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려는 즈음, 나는 어느 소설가와 마주 앉아 장르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농담과 진담을 오가는, 웃으면서도 손이 시린, 그런 대화. 헤어지기 전 나는 그의 팔을 꼭 쥐었다. 아팠으려나.
분명 사랑해, 하면서 시작한 시인데 내려놓고보니 발끝도 보이지 않는 캄캄함일 때, 찬란한 여름 속으로 뻗어나가는 언어를 상상했는데 춥고 야윈 갈비뼈 하나를 주웠을 때, 비참하거나 화가 나진 않지만 아무 말 없이 어딘가 기대 눈을 감고 싶어진다. 가끔은 자아보다 언어가 앞설 때가 있고, 내가 글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향해야 할 운명에 이끌려 나부끼는 것일 뿐이라고 느낄 때도 있다. 산골의 나타샤, 베키오 다리 위의 베아트리체, 눈내리는 대낮의 갈까마귀.
한유주의 소설을 읽으며 덩굴식물을 떠올렸다. 휘감을 것이 없으면 덩굴식물은 대체 어디로 뻗어갈까. 무성한 생명력으로 지상의 모든 키낮은 풀과 꽃을 뒤덮으며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바닥을 기는 덩굴식물은 절규조차 할 수 있을까. 쓰고 지우고 쓰고 지워서 단 하나의 언어라도 남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사이 - 그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는 모든 순간이 지독한 비린내를 풍기며 온세계를 뒤덮고 있다. 그러나 '나'는 덩그러니 남아, 메마르고 푸석한 구석에 겨우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고 있다. 혼란과 잡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소설가'만이 막 작동을 포기한 심장처럼 고요한 일직선을 그리고 있다. 그 직선의 끝, 그 아무 것도 없음의 끝에 최초의 짖음이 도래할 것인가.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은 지하실의 동료들은 최초의 짖음으로 나부끼며 밀려왔다. 문을 열면 빛이 쏟아질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문고리를 잡기 바로 직전, 눈을 감은 자의 순간은 얼마나 지글지글 끓어오를까. 뼈까지 젖을 정도로 추울 것이다.
이 글들이 과연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다. 구조는 해체되고 인물은 지워지고 윤곽만 남는다. 서사는 있지만 이야기는 없다. 지독한 에고마저 느껴진다. 그건 언어를 향한 고집이나 순정, 내가 써야만 하는 것인데 써지지 않는 것, 혹은 그것이 써야만 하는 것인지 아직 결정내리지 못한 자의 망설임 같은 것이다. 그렇다. 이건 순정에 관한 글이다. 그렇다면 한유주의 소설은 앞으로 어디로 향해야 할까. 그녀가 열고 싶은 문은 무엇인가. 아마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앞에 그 문은 이미 와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 눈을 뜨고 언제 몸을 일으켜 언제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고 돌릴지, 그건 신도 독자도 그리고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다.
한유주의 언어는 덩굴 식물을 연상시키지만 식물의 언어는 아니다. 요즘 자주 마주치는 광물의 언어도 아니다. 그녀의 언어는 동물의 언어다. 온전한 몸을 가진 새끼를 낳고 젖을 먹어 기르는 포유류의 언어다. 개가 있고, 개가 죽고, 죽은 개를 파묻고, 개를 파묻은 삽을 파묻고, 죽은 개를 바라본 눈을 파묻고, 시동을 끌 수 없어서 벼랑으로 차를 몰지만, 승강장에서 낯모르는 사람들이 주는 술을 마시고, 좌석에 앉아 마르고 뻑뻑한 눈을 감고, 죽음을 향해 가면서, 소설의 제목은 "자살자의 칼"이다. 지하의 자살희망자들은 꿈도 희망도 없이 삼십대의 아침을 맞았을 것이다. 통사를 잃을지언정 이름을 잃을 수는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