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서한집

by 별이언니

만약에 동시대에 살았다면 선생으로 사숙했을지도 모른다. 목요일 그 집에 찾아가 말석에 앉아 있는 듯 없는 듯 이야기를 듣다가 한눈을 팔다가 운이 좋으면 향이 좋은 차나 버섯밥이라도 얻어먹고 돌아올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엔 나도 모르게 감각이 고양되어 있어 담장 위의 고양이를 보고 깜짝 놀라거나 내 그림자를 밟는 것에 마음이 쓰이거나 가을볕이 물에 떨어진 것을 보고 모르는 사이 봄이 와 꽃이 피었나 쓸쓸하기도 할테다. 그리고 물론 이 모든 감상은 선생의 야단을 부를테고.


그는 문학적인 수사가 어울리는 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가장 혐오한 것이 있다면 그런 종류의 겉멋이 아닐까. 허약하게 태어나 평생 예민한 신경 탓에 위가 아팠던 사람이지만 마음 속에는 부러지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그를 세류에 휩쓸리지 않게 도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의 큰 물은 항상 그를 데려가려고 했지만 그는 애도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옆으로 비켜서서 살아가는 일에 골몰했다. 그는 문학을 사랑했나. 모르겠지만 보는 눈은 매웠고 쓰는 일에는 유난스럽지 않은 열정을 가졌다. 하지만 이 서한집을 읽고 내게 가장 크게 다가온 면은 그는 끝끝내 '내 명대로 살다 죽을' 각오를 다진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생활을 비웃지도 않았고 생활에 목을 매지도 않았다. 그에게도 나름의 격랑이 있었겠지만 편지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향이 살짝 스민 햇차처럼 밋밋하고 담담하다. 그야말로 저기 기다리고 있는 '자연스러운 죽음' 그리고 그 후에 펼쳐질 다른 차원의 깨달음을 향해 수행정진하는 모습이랄까. 그리고 그 과정은 탈속한 종교인이 아니기에 놀랄만큼 세속적이다. 보수가 없는 글은 쓰지도 않고 나름 꼼꼼하게 노동조건을 따져 임금을 책정하고 사치하지도 않지만 궁핍한 것도 싫어하는 그저 생활인이다. 하긴 인간의 수행정진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받아들이고 잘 흘려보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호들갑도 그렇다고 엄살도 없는, 자연스러운 목넘김. 밥을 먹고 양치를 하고 차를 마시고 책상에 앉아 그날치의 글을 쓰는 일상을 이어가는 일. 그 안에는 희망도 있고 절망도 있지만 그는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의 문학동료들에게 편지를 통해 보낸 '작품감상'도 비슷한 결이다. 억지스런 문학적 수사는 거북해했고 인물이 자연스럽지 못하면 재미가 없다고 반박했으며 화려한 미사여구 아래 숨겨진 허약하고 단순한 메세지에 대해서는 가차없었다. 그는 글을 '자기자신의 탐구생활' 로 받아들였다. 모르는 것을 쓸 수는 없다. 작가에게 세계란 결국 자기자신이라는 우주인 것. 그는 문학에 있어서도 엄격했다. 역량을 과장해 펼치지 않았고 닿을 수 없는 것을 갈망하며 비탄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에게 살아감과 글쓰기는 같은 의미를 가졌던 것 같다. 카르마 혹은 업이라고 불리는 것. 태어났기에 죽고 그 사이에 놓인 무수한 분과 초를 마음을 다해 살아간다. 고통을 몸에 새기면서. 그리고 그 고통이 만들어내는 또다른 결을 쓴다. 그건 한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 삶에게 질문하고 대답을 듣고 다시 질문하는 일의 연속이다. 그건 '삶' 이다.


이러니 내가 있는 듯 없는 듯 말석에 앉아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겠는가. 나는 편지를 보내 특별한 연을 맺고 싶지도 않고 그를 독점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의 말을 직접 귀로 듣고 싶다. 신문에 실린 따끈한 연재소설도 챙겨 읽고 싶다. 백년 전 사람이 이렇게나 담백하고 아름답다니. 단순한 언어가 아름다운 시절에 살아 행운이군요, 선생 - 하고 말을 건네려다가 이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언사인가 깜짝 놀란다. 인간의, 특히 예술가의 생에서 단순한 것이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다. 그렇게 보인다면 그의 복잡하고 일그러진 영혼이 나부끼는 이상향이 단순함일 뿐.


나도 그러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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