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나 시집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by 별이언니

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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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인은 선명한 이미지를 남긴다. 이 시인의 첫 시집을 읽고 나는 정돈이 되지 않은 집, 생활감이 사라진 집의 어둑한 부엌에 쪼그려 앉은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작은 그릇이다. 거기엔 쌀알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다. 여자의 어깨는 둥글고 목덜미에는 살짝 살이 올라있다. 잔잔한 땀이 여자의 정수리에서 배어나온다. 여름 오후 어느 적막을 잘라 부려놓은 듯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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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새 시집이 나왔고 나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친다. 산뜻한 파스텔톤의 표지 가운데 박힌 샛노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실례합니다 - 아주 조그맣게, 들리지 않는 인사를 건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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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은 중간 높이의 식탁. 흰 식탁보 위엔 레몬 한 알이 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레몬 한 알.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발을 멈춘다. 공기 중엔 은은하게 레몬의 향이 떠도는 듯도 하지만, 곧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든다. 그러나 나는 레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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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의 거죽은 살짝 말랐다. 오래 실온에 두어 과숙된 느낌도 든다. 베어 물어도 견디지 못할 것 같지 않다. 이 집은 내 기억보다 훨씬 청결해졌고, 여전히 생활감이 없기는 하지만 자주 쓸고 닦아 사람의 정성이 느껴진다. 어깨가 둥글고 피부가 하얀 여자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간다. 등 뒤에서 소리없이 현관이 열리고 여자는 햇빛 속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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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내가 지나왔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골목과 하천을 지나고 지하철을 타고 하염없이 가서 축제와 사랑을 지나고 광장 한가운데 선다. 여자가 무심히 지나온 풍경들은 그저 그대로 뒤에 남겨두고. 여자는 묵묵하다. 자잘한 땀이 솟아 흰 옷을 적신다. 자, 여기까지 걸어온 여자여, 당신은 다시 발을 멈췄고 아직 노래를 부르지는 않아. 당신은 사람의 소란을 귀신처럼 지나와 여기 있구려. 그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이야말로 당신의 기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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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만히 쪼그려 앉아 무릎을 감싼다. 여전히 내 눈은 저 노란 레몬에 걸려 있다. 레몬의 노란 색이 점점 커져서 나는 여기서 움직일 수 없다. 어깨가 둥글고 수그린 목덜미가 도도록하다. 잔잔한 땀이 정수리에서 배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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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을 열고 들어와요, 당신. 이렇게 지켜보는 일은 숙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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