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호 시집 <저녁의 기원>

by 별이언니

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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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어디에서 왔을까. 언덕 너머, 마을 건너, 바다의 저편에서 왔을까. 나를 바라보는 너의 표정에서 왔을까. 왜 이렇게 설레는지 이유도 모르고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운동장 끄트머리를 바라보는 사춘기의 불안정에서 왔을까. 어제 나는 저녁을 만났나. 오늘 저녁은 이미 내 앞에 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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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인은 평생 맞물리지 않는 주머니를 들고 걷는다. 노래가 비고 노래가 채워지는 유랑. 구멍이 난 주머니 속에 잎사귀, 할머니, 애인, 돌멩이... 무엇을 집어넣어도 잃어버리는 방랑. 그러나 왜 그 방랑은 청결하게 느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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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런거리는 마음을 끌어안고 이 시집을 폈다. 복간본이고 처음 펼쳐지는 시부터 마치 어제 읽은 것처럼 살이 아프다. 이 시들을 처음 읽었을 때도 나는 살이 아팠다. 며칠을 앓으며 읽었다. 그러나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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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기는 해도 책장을 넘기는 것이 더디지 않다. 언어들은 내게 머물렀다 스미고 사라진다. 휘발되는 언어들의 냄새를 맡는다. 서글프게. 나도 나이를 먹었나. 이 아픔들이 놀랍지 않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머는 고통이 익숙하다, 이젠 내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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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겨우 시인의 발뒤꿈치를 만져볼 수 있나. 나도 어른이 되었나. 그러나 이 시에서 팔꿈치가 툭 튀어나온 소년은, 말수가 적은 소녀는, 어미와 할미와 아비들은 여전히 어느 저녁에 고여 있다. 소인이 찍혀있지 않은 봉투를 뒤집는 심정으로 다시 첫장을 펼친다. 모계(母系). 여름이 흔들렸기에 나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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