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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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끄고 미러볼을 켜면 부서진 빛조각들이 벽과 바닥을 쓸고 와 내게 잠시 머물고 사라지겠지. 어두운 방안에서 거울도 없이 립스틱을 발라보는 일. 그건 나의 아주 조그만 퇴폐, 소심한 나의 일탈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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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쓸쓸하게 살아도 되나 묻고 싶다가도 담담한 언어에 그만 조용히 끄덕이고 만다.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 너머에 가 있는 사람, 그건 파국을 쉽게 예감하는 못된 버릇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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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이미 파편으로 흩어진 빛, 손에 잡히지 않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리고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사랑해서 똑바로 쳐다볼 수 없고 달려가 만져볼 수 없고 이 마음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비스듬히 돌아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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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병이 깊었던 어느 시절엔 커텐을 절대 열지 않았다. 창밖의 눈부신 풍경을 내 방안에서까지 보고 싶지 않았다. 먹고 사는 일 때문에, 아니 그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아침이면 울면서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움켜쥐고 주저앉아있다가 겨우 나가던 시절. 그 시절부터 나를 알던 후배는 얼마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누나는 항상 안정감 있어 보였어. 나는 쓸쓸하게 대답했다. 그 안정감을 너희에게 주려고 내 안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난 안간힘을 쓰며 버텼어.
왜?
몰라, 아마 허무해서일까.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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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너무 소중해서일까. 나를 둘러싼 세계는 너무 아름답고 환해서, 나는 차마 이 아름다움 속으로 나의 병을 끌고 들어갈 용기가 없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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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젊은 시인의 달관한 언어를 만지며 문득 깨닫는다. 어느새 나는 그늘 하나 없는 세계의 이질감을 알게 되었다고. 그건 나의 상상일 뿐이고. 이 세계는 짙고 옅은 그늘이 번져 있어 더 아름답다는 것을. 너무 지친 사람이 발을 멈추면 그늘은 부드럽게 팔을 뻗어 그의 머리 위로 그윽한 쉼을 드리운다. 그가 알던 모르던. 누군가의 병에 어깨를 기대고 잠시 쉬는 것도 위로이고, 누군가의 빛에 이마를 맡기는 것도 수렁이 아닌 그늘로 세계에 머물 수 있는 힘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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곯은 열매를 창가에 놓아두면 천천히 무너진다. 과일은 썩기 시작할 때 가장 달콤한 냄새를 풍긴다. 그럼 벌레들이 날아와 과일의 마지막 단맛을 물고 날아간다. 나무 아래 두면 몸은 흩어져 개미의 먹이가 되고 씨는 땅으로 스며든다. 어느 계절, 다시 단단하고 향긋한 과일을 영글 자궁으로. 한 알의 과일은 그렇게 과일나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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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병이 당신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창을 연다. 오늘 내가 걸어들어갈 풍경들을 바라본다. 저 숱한 그늘들, 저 아름다운 그늘들, 살냄새나는 그늘들 사이로 나도 서늘하게 스며들겠지. 무릎이 꺾일 정도로 힘들 때 내 이마를 쓸어줄 빛도 있을테니. 다정한 목소리도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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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적당한 시간 적당한 장소 적당한 기분에 쉴 그늘이 당신 발앞에 머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