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신세계가 역사적 · 정신적 순환의 영원한 회귀 속에서 떠오르고 있다. 근심의 겨울에 뒤이어 찾아온 것은 그 유사한 것의 기교이다. 백색의 불안에 뒤이어 패러디의 비통한 오락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반대이기도 하다. 결국 진실은, 고통스러운 거울놀이 속에서 확고해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꾸며낸 장식들의 번쩍거림 속에서 제 갈 길을 간다. 정신적인 삶의 경이로움은 무엇보다도 방어와 전략, 미소와 눈물, 태양과 우울증의 교대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등을 맞대고 태어난 쌍둥이다. 해와 달, 낮과 밤, 탄생과 죽음, 열렬함과 가라앉음 - . 인간은 사랑에서 잉태되어 사랑으로 양육되고 사랑으로 죽기 때문에 성 충동 -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인간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같은 자궁에서 태어났지만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이 쌍둥이의 균형이 무너진다면 한낮에 검은 태양이 뜬다. 피 흘리는 자궁, 멜랑콜리의 태양이다.
아름다운 것을 오래 들여다보면 병이 든다. 물에 비친 자기 얼굴에 홀려 말라죽은 나르시스처럼. 우울은 저 먼 무의식의 바다에서 한점의 빛을 띄워올리고 우리는 말을 잊고 그 빛에 홀려 침잠할 뿐이다. 홀바인의 죽음, 네르발의 어둠, 도스토예프스키의 고통, 뒤라스의 슬픔은 찬란한 빛을 모두 집어삼키고 세상을 어둠에 가라앉히는 태양이다. 용서와 구원을 바라지만 그들의 용서도 그리고 구원도 더 깊은 어둠에 빠지는 일이다.
검은 태양을 목격한 적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 멜랑콜리의 연인이 된다. 어둠이 완벽하게 그들을 감싸 안아 지워줄 것만 같다. 끝없는 우울에 가라앉아 망각과 상실의 은총을 받을 것 같다. 그러나 검은 태양도 태양. 태양은 살아있는 것들을 양육한다. 태양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다. 무덤에서 꽃을 기르는 신자들처럼 흘러넘치는 검은 태양의 빛에서 아름다움과 숭고가 태어난다. 우리는 그런 예술작품들을 알고 있다. 예술가들은 멜랑콜리를 앓는 자, 우울의 차가운 뺨에 얼굴을 기대고 거기 비친 세계의 그림자를 사색하는 이이기에.
그러나 예술가들은 또한 에로스의 현신이기도 하다.
타나토스의 욕망은 소멸의 욕망이 아니다. 죽음 충동은 갱생과 부활의 충동이기도 하다. 완전한 무에 대한 갈망은 치유를 통한 새로운 육체를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과 하나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타나토스에 매혹당한다. 용서받고 싶고 구원받고 싶다. 용서와 구원,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것을 향해 몸을 태우는 일은 역설적으로 멜랑콜리에 더 깊이 빠져드는 일이다. 우리는 낫지 않는 상처, 스스로 후려치는 채찍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에 매혹된다. 우리의 몸에도 검은 담즙이 흐른다. 우리의 몸 일부가 잠겨 있는 그늘 - 그러나 오래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기엔 두려운 어둠에서 길어올린 우아와 숭고가 부른다. 보이지 않지만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영혼의 탯줄이 당긴다.
멜랑콜리의 연인들은 결코 완벽하게 회복될 수 없다. 누구보다 치유를 갈망하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들이 지나온 시간, 그들을 스친 사람들 - 그것은 누적된 아름다움이다. 달콤하고 상냥하지는 않지만, 부드럽고 위로하지도 않지만, 일그러진 욕망의 표정을 마주 보고 소스라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이들이 거기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길어올린다. 검은 태양은 매혹이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신이다. 누구든 검은 태양을 마주한 자 있다면 기꺼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으리라. 아름다움의 편에 선다면 멜랑콜리는 질병이라기보다는 신앙에 가까운 것이므로.
오늘도 무덤에서 꽃을 따서 엮는다. 이 차갑고 고요한 언어들이 나를 이끌어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