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친아빠와의 사랑을 영어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새아빠 존에 대한 배려였는지, 친아빠와의 사랑을 아름답게 추억하고 싶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리아는 백 번쯤 들은 그 장면을 상상하며, 한국의 진도라는 섬, 회동이라는 바다에 가고 싶었다. 오렌지색 노을이 깔린 환상 속에서, 얼굴도 모르는 리아의 아빠는 언제나 스무 살 소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에 사는.
- 박지음 <영등> 중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건너가야 할 때가 있다. 동네에서 동네로, 도시에서 도시로, 친구에서 친구로, 사랑에서 사랑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 .
바다가 열리면 고양이 섬으로 가는 길이 생긴다. 밤이면 고양이 눈에서 이는 불로 온섬이 환한 곳으로 가기 위해 현과 남편은 악다구니를 쓰며 내달린다. 몸 말고는 아무것도 맞지 않았던 부부는 생닭을 뜯어먹는 야생 고양이 섬에서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르는 딸을 구하러 가는 길만큼은 하나의 톰볼로 위이지만 마음도 속도도 모두 다르다. 그러나 각자의 길이 달랐기에 딸은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모두가 하나의 길 위에서 서로 잘 들어맞는 생을 나누는 것만이 아름다운 결말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아니, 무슨 말이람. 삶이란 것은 대체로 아름답지 않고 악몽 같은 순간은 시시때때로 다시 찾아온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한 순간이면 문득 삶이란 기시감으로 이루어진 미로가 아닐까 싶다. 비슷비슷한 방문이 끝없이 이어진 공포영화 속의 저택을 헤매는 것처럼.
그러나 혼을 띄워 바다를 건너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 있고 거기 늙지도 않는 첫사랑의 소년이 있기도 하다. 살아서는 도저히 건널 수 없었던 바다를 피를 이은 혈육이 마저 건너준다. 상처와 상처를 이어준다. 거기 있었지만 거기 없는 것처럼 살아야 했던 길이 안갯속에서 일렁이며 나타난다. 기적처럼. 죽은 자가 떠나며 혼불을 밝혀 길을 비춘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다시 걸을 수 있도록.
죽은 남편을 불러오기 위해 음기가 센 지하도를 건너지만 정작 그리워하던 버디는 남편을 만나지 못한다. 대신 하루하루 살아갈 방법을 찾지 못해 벽을 더듬듯 살던 이는 드디어 남편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먹이고 삶의 악다구니에 몸을 던질 용기를 얻는다. 그것이 비록 벗의 고혈을 쥐어짜는 일이라 해도. 피라면 얼마든지 나눠줄 수 있지만 빚독촉 전화를 끊을 수는 없다. 집에는 먹여야 할 아이들이 있다. 애도는 지나가고 삶은 실전이다. 지하도 밖은 절절 끓는 폭염의 대낮이다.
지금 우리가 어느 길 위에 있고 어느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 길 위에 있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지독한 날씨에 갇혀 있는지, 걸을 힘도 없어서 멈춰있는지 우리 자신은 모를지라도 촘촘하고 휘황한 신의 눈은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끝없이 리플레이되는 상처 속을 헤매는 악몽일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그러나 재현과 반복 속에서 똑같은 자세로 넘어지고 구를지라도 조금씩 나아간다, 인간은.
가끔 우리의 불행이란 자궁에서 옮아온 무늬 같은 거라서 모두의 불행은 달라도 나에게 닥치는 불행은 늘 비슷비슷한 무엇 같다고 생각한다. 심리 상담을 받아도, 사람의 그늘에 머리를 기대도, 도망을 가도 -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각자의 불행. 기시감의 가시 블록. 죽는 날에도 비슷한 얼굴의 불행은 초인종을 누르며 찾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두 각자의 톰볼로가 있다. 겹쳐지지 않는 자신만의 길이 있다. 불행이 찾아온다면 한숨을 쉬며 손을 잡고 함께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길을 다 건너면 이 생의 업이 끝나고 다음 생의 숙제가 주어지겠지. 박지음의 여자들은 한결같이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멈춘 것처럼 보일 정도로 느리더라도 그녀들은 살아가는 일을 이어간다. 자고 먹고 때로 대화하고 때로 울부짖고 때로 침묵하면서 복제품 같은 하루를 쌍둥이 같은 불행과 함께 산다. 위대한 삶이 아닌 평범한 하루의 연속. 위로이며 구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