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 연유로 인해 역으로 '외상'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깊숙이 자기고유화의 욕망을 야기하는 듯하다. '바깥'으로부터 초래되어 '바깥'으로 벌어진 이 상처를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하지 않고 과연 어떻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상해로 인해 상실당했다고, 혹은 빼앗겼다고 상정되는 어떤 것 이상으로 상해 그 자체를, 상처가 그 흔적인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하지 않고서 말이다. 그것은 단적으로 삶에 관련된 문제다.
우카이 사토시가 부르는 그 많은 이름들 - 상처의 고유명사들을 나도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전 세대가 흘린 피를 마시고 핀 꽃들을 바라보며 감탄하며 우리는 자란다. 전 세대가 지은 죄를 영문도 모르고 대속하며 우리는 늙는다. 세계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서로 연결되어 우리는 상처를 내고 상처를 입는다. 알면서 혹은 모르면서.
세계가 커다란 상처의 크레바스다. 피 흘리는 연약한 살에 움트고 자라나 꽃 피고 저무는 생명들은 자기가 상처에서 자라난 아름다움이라는 자각이 없다. 우카이 사토시가 여러 번 인용한 장 주네처럼 - 어쩌면 정말 '아름다움에 상처 이외의 기원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 주네의 아름다운 상처조차 응시하는 힘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인간의 세상에서 인식되고 명명되지 않는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우주란 겨우 그 정도다. 그러나, 그러니만큼, 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우주는 무한하기도 하다. 여기에 이 전쟁의 시대, 피 흘리는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 있다. 응시하고 명명하고 이윽고 부르는 일 - 상처에 응답하는 힘.
세계는 너무나 커다란 상처라 모두의 치료법이 같을 수는 없다. 누군가는 상처를 진단하고, 누군가는 상처의 기원을 파헤치고, 또 누군가는 산을 올라 특효가 되는 약초를 찾고, 상처를 덮을 거대한 붕대를 잣는 이가 있고, 붕대의 귀퉁이를 잡고 사방으로 뛰어 팽팽하게 상처를 덮는 이들이 있으며, 상처를 봉합할 실을 커다란 바늘 귀에 넣는 손들이 있고, 흉 없이 아물기를 밤을 새워 기도하는 이가 있다. 노래와 춤으로 고통을 위로하는 이들이 있고, 약을 바른 자리를 수시로 찾아와 들여다보는 이가 있다. 그 모두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 - 아픔을 부르고 아픔의 부름에 응답한다는 것이다.
1955년 도쿄 출생. 책날개에 적힌 우카이 사토시의 이력은 이렇게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십 년 후 - 반성하지 않는 전범국가에서 태어난 예민한 지성이란 특이점. 몇 년 전 도쿄의 어느 아침, 편의점 직원의 소박한 아침인사에 멍하니 대답하며 나는 생각했다. 인간 하나하나의 따뜻함은 이렇게 살갗에 직접 와서 부딪치는 무엇인데, 왜 국가라는 집단이 되면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리는 걸까. 내 눈앞에서 웃고 있는 이 주근깨 가득한 소녀의 마음속에 아무렇지도 않은 살의가 움틀 확률은 희박할 텐데 - 거스름돈을 잘못 건네준 것만으로도 목까지 빨개져서 저렇게 연거푸 사과를 하는데. 저 희미한, 저 연약한, 저 자그마한 인식의 지평이 조금만 넓어진다면 - 눈앞의 내가 아니라 내 뒤에 펼쳐진 세계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다면 -라고 간절히 바라던 아침이 있었다. 이 바람으로 우카이 사토시는 평생을 글을 쓰고 목소리를 냈던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