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곤택 시집 <죄 없이 다음 없이>

by 별이언니


봄이 오긴 오나 보네요
오늘 낮엔 구청에 다녀왔는데 거기 화단에
산수유가 노랗게 피었더라고요

이런 편지를 쓴 적 있구나
장마가 시작되었다
우산 들고 동네 한 바퀴
절반은 물이 돼서 돌아온 아침
그치기 어려운 일들
편지를 읽는다 여러 해 전의 편지

담배는 끊지 못했습니다
동네 한 바퀴 빠르게 걸었더니 땀이 흐르네요
비가 오면 좋겠습니다

임곤택 <너는 쉽게 속는다>




간이역의 정서를 가진 사람이 있다. 여기 버스 서나요? 네, 서요. 그래서 기다렸다. 모자를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다가 활활 부치기도 하면서.


저, 여기 버스 정말 서나요? 네, 서요.


여름 오후지만 서너 시가 지나면 해가 살포시 기울고, 낯선 이와 나란히 앉아 기약 없이 기다리기엔 시골길은 너무 고요하다. 매미와 풀벌레, 사방 우거진 풀과 꽃들이 내 편을 들어준다면 모를까,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는 길 가운데 앉아 있는 일은 숨이 막히다.


저...

네, 서요.


뭔가 마음속에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다가 맥이 탁 풀렸다. 이럴 때만 대책 없이 긍정적이야. 아냐, 긍정적인 게 아니라 대책이 그냥 없는 거지.


그리고 버스가 왔다. 버스에 오르다 뒤를 돌아보고 물었다.


안 타세요?


네, 안 타요.


눈부시게 쏟아지던 햇빛에 그의 표정은 다 지워져 기억나지 않는데, 반만 남은 미소가 손톱달처럼 떠올랐다. 낮에 뜨는 달은 생각보다 선명하다. 그 미소만 오래 기억했다.


시집을 읽으며 오래전 그 여행이 떠올랐다. 그는 아직도 거기 앉아있을까. 구부정하게 몸을 구부리고, 운동화 끝만 바라보면서.


그도 나처럼 끊지 못하는 무엇이 있겠지. 가만히 주저앉은 마음이 있겠지. 버릇이 되어버린 감정이 있겠지.


보내지 못하는 편지의 문장에 엎드려 귀를 기울이면


마음을 끌고 가는 어느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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