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목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by 별이언니


몸은, 수많은 발자국을 껴입고 있어서 가는 곳마다 발자국을 벗어놓는다.
역장은 알린다.
이 역을 떠나는 손님께서는 자신의 발자국을 다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신용목 <눈사람의 시체를 찾아 바다를 헤매는 자의 지느러미가> 중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라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볼 때마다 상상해요. 내가 저기 있다면 어떤 표정으로 다가오는 소행성을 바라보고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고 있을까, 그저 공포에 질려 무릎 속에 머리를 박고 있을까, 아니면 그녀처럼 환희에 찬 눈으로 죽음에게 문을 열어주고 있을까.


난 아마 담담하게 기다리지 않을까요. 하나도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내가 뭔가를 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비극에서 구원할 수 있다면 바쁘게 움직이겠지만, 소행성 충돌 같은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으니


아마 나도 시인처럼 아프게 생각하겠지요.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발자국을 다시 데려오지 못했는데.


내가 품고 있는, 당신에 대한 마음은 너무 소중해서 꼭 끌어안고 있겠지만


누군가 내 마음의 파편으로 지금 깃털만큼이라도 무겁다면


난 괴롭겠죠. 그것이 그에게 기쁨이라면 몰라도,


사실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세상의 온갖 탈것들을 타고 헤아릴 수 없는 기후를 지나 제시간에 도착한 시인의 사람들은


옷이 젖거나 머리카락이 무거워도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내게 당신이 그러하듯


나도 당신에게 아름다운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은 내일의 날씨를 염려하며


잠들 수 있기를 바라요.


하루하루 공기의 결이 부드러워지는


좋은 계절을 막 지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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