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온 <왜가리 클럽> <지구 종말 세 시간 전>

by 별이언니


괴로움도, 외로움도, 슬픈 일도 발바닥만 비비면 된다잖아. 을마나 쉽냐.
이아연 <강해순 트위스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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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narrative) - 정해진 시공간 내에서 인과 관계로 이어지는 허구 또는 실제 사건들의 연속



위 정의에 따르면 모든 문학은 내러티브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세계 속을 사는 생물 혹은 무생물의 발화. 실제로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인간의 세상은 너무나 넓고 복잡해서 인과가 흐리지만 이 세계에서는 맥락 없는 일은 없다. 진득한 삶의 정수만 모아놓은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숨을 들이마시면 운이 좋은 날 구름 낀 바다를 건너면 닿을 수도 있다는 섬에서만 자라는 꽃의 향기가 난다.



모든 예술 장르 중 문학이 가장 인간적이다.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문학만이 인간이 발명한 도구인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해 만든 도구. 언어를 사용하는 문학은 태생적으로 메시지를 품고 있다. 의사소통의 형식은 다양하게 진화되어 왔지만 문학은, 비록 그것이 광장의 독백일지라도, 근본적으로 발화의 특성을 가진다. 발화자의 의지가 가장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예술, 그것이 문학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어란 개방적이면서 동시에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문학은 고집불통의 일방통행 의사소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가득 모인 길 한가운데 지어진 유리온실 안에 앉아 벽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소리 높여 하루 종일 외치는 자. 그것이 작가다. 그가 뿜어낸 숨으로 얼룩진 온실의 사방 벽, 그것이 그의 작품이다.



내러티브온 사인이 켜지고 나는 흥미진진 이 작고 정밀한 세계를 바라본다. 거기엔 왜가리를 관찰하는 여자들이 있고, 타인의 신호를 수신하는 법을 배우는 이들이 있으며, 사랑하는 고양이의 복수를 위해 킬러가 된 사람이 있고, 물풀 하우스의 푸른빛에 얼굴을 적시기도 한다. 결국은 바이킹이 되어버린 자, 경계의 저편에서 보내준 살아가라는 신호, 점멸하는 0과 1의 이진법 세계에서 훔쳐진 인생, 빈 둥지에 남겨진 아이가 나를 바라본다. 지구 종말 세 시간 전에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묻기도 하고,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기도 한다. 내 살이 뜯기고 손톱이 토막 나는 고통에 악몽을 꾸면서 몸을 떨었던 정글의 비명도, 찾고 싶었지만 알고 싶지는 않았던 진실도 있다. 그리고 모자라고 아파도 너희들 짐이 아니라 내 짐이라서 업고 안고 살 비비며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 환상과 현실, 희극과 비극, 담담한 시선과 방황하는 걸음까지 모두 어딘가에서 나를 스쳐갔던 감정들 같다. 추웠다가 더웠다가 울었다가 웃으며 나는 이야기의 벽을 넘나든다. 하나의 세계를 빠져나올 때마다 내 옷에 흐린 얼룩이 생기는 줄도 모르고. 책장을 덮고 내러티브온 사인이 꺼진다. 나는 온갖 냄새와 얼룩으로 뒤범벅이 된 이야기의 사람이 되어있다.



우리가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나는 인간을 알고 싶어서 읽는다. 현실의 인간은 너무나 많은 면을 가지고 있어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살아가는 시간에서 오해도 하고 가끔 싸우기도 하면서 알아가는 인간은 진짜다. 살과 피가 있고 수천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는 진짜. 모순적이고 그래서 아름다운 진짜. 하지만 이 정교한 가짜 인간들의 삶은 그야말로 인간성의 정수라서 나는 달조차 어두운 어느 신탁의 밤, 머리를 풀고 뚜껑을 열어 혀 위에 올리는 극약을 맛보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읽는다. 인간이 살아온 그 오랜 역사 동안 수천수만 개의 파편으로 빛났던 인간의 표정을 그러모아 오래 달여 만든 약. 그것이 내러티브다.



유리온실의 박람회가 막 시작되었다.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가 슬그머니 웃음을 흘리게도 하는 요절복통 환상의 밤이. 그러나 하나 기억할 것은 바로 이것. 괴로워도 슬퍼도 열심히 땅에 발바닥을 비비면 넘어간다. 다음 순간이 온다. 꼭 운이 좋은 날이 찾아온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내일의 날씨를 기대하며 이불을 턱밑까지 올리고 눈을 감는 일. 우리는 그렇게 매일매일을 살아가지 않나.



알 수 없다. 우리의 이 느슨한 내러티브도 우주의 역사에 기록되고 있을지도. 누군가 맑은 눈으로 흥미진진 책장을 넘기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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