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엘리제 르클뤼 <산의 역사>

by 별이언니
눈에서 녹아내리는 뽀얀 급류는 방금 녹은 아이스크림 같다. 그 물줄기는 끊임없이 가지를 떠는 꽃다발처럼 작은 섬을 감싸며 갈라진다. 햇살을 가리는 바위 그림자 속의 눈밭에서 알록달록한 꽃들이 가득하다. 꽃들은 포근한 체온으로 주변의 눈을 녹인다. 마치 꽃들이 푸르스름한 그늘 속에서 크리스털 술잔처럼 솟아올랐다고 할까. 이런 꽃들보다 예민한 꽃들은 감히 굳은 얼음을 건드리지 못하고 부드러운 눈더미로 자신을 감싼다. 붉은 패랭이꽃은 눈더미 위에 올라앉는다. 흰 거위처럼 방석 한복판에 놓인 푸른 벨벳 위에 루비를 얹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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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좋아하지만 산은 좋아하지 않는다.


숲이 주는 열린 폐쇄성을 사랑한다. 완전히 갇히는 것은 무서워한다. 예전에 동굴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출구로 빠져나오기까지 이십여 분 동안 공포로 패닉 상태였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지하철을 오래 타거나 사람이 많은 승강기를 타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숲은 다르다. 숲은 성근 포대기처럼 나를 감싸 안는다. 빽빽이 선 나무들은 나를 안전하게 에워싼다. 하지만 그 팔은 열려 있어 고개를 들면 햇빛과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힌다. 숲의 쇄골에 이마를 기대고 잠들면 숲은 커다란 그늘을 펼쳐 나를 세계로부터 보호하지만 잠에서 깨어 걸음을 옮기면 언제든지 몸을 열어 놓아준다. 숲은 내게 은신처와 같다.


산은 올라가야 해서 좋아하지 않는다. 도시 인근의 산에서 만나는 인간은 눈이 아프도록 알록달록한 색을 뒤집어쓰고 거친 숨을 내쉬며 정상을 향해 내달린다. 목적이 명확한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 나의 별난 성격 탓도 있지만 유달리 산에는 '정복' '승리감' '성취' 등의 레테르가 붙는다. 평지에 사는 인간의 눈에 산은 거대한 융기. 인간의 눈으로는 구름에 가린 정상을 바로 볼 수 없어 신의 집으로 숭배했다. 그러나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 이 호기심은 세계를 다채롭게도 하지만 폭로하고 누설하기도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건너 신대륙을 발견하고, 새의 날개를 흉내 내어 하늘을 날고, 밤하늘에 뜬 별에 닿기 위해 쇳덩이를 우주로 띄운다. 인간은 산에 오른다. 히말라야와 알프스, 세계의 지붕은 인간의 발자국으로 얼룩졌다. 순연한 만년설에 썩지도 않을 쓰레기를 버리면서 인간은 구름 아래 신의 거처를 무단 침입해 흥망성쇠 할 나라의 깃발을 꽂는다. 산에 발을 들이면 나도 그런 욕망에 휩쓸리는 것이 아닐까 불쾌한 감정이 먼저 몰려왔다. 이십 대 후반부터 삼십 대 초반까지 다녔던 직장의 팀 동료들과 여러 산을 오른 적이 있었는데, 편치 않은 마음으로 등산을 하다가 무릎과 허리를 다쳐서 오래 고생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인간의 세상에 환멸을 느껴서 산으로 숨었다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산은 그저 우뚝 선 삼각형의 돌기가 아니다. 산에는 골짜기도 있고 평탄한 길도 있고 군데군데 작은 고개도 있다. 그리고 지구의 어느 곳인들 그러하지 않겠냐마는 인간의 마을도 있다. 산에 사는 사람은 산을 정복하지도 그렇다고 산에 굴복하지도 않는다. 산에 사는 사람은 산에 깃든다. 자연과 가까운 곳에 먹고 자는 터를 꾸린 사람은 자연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의 질서로 움직이는 자연에 잡아먹히기 때문이다. 산다는 일은 투쟁하는 일이 되어서는 결코 오래갈 수 없으므로 서로 잘 이해하고 적응해야 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도 그렇고 인간과 자연도 그렇다.


그렇다, 산은 거대한 융기이며 겹겹의 주름 주머니. 주름에 숨어서 잠깐 세상을 잊고 세상의 자신도 잊고 싶었던 저자는 목동을 만난다. 산 아래 사는 인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간, 그러나 쓰러져 기댄 품을 사랑하게 되면 애정의 동지로서 은밀한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을. 그렇게 그는 감은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본다. 산의 주름은 풍성하다. 나무와 풀이 자라고 온갖 꽃이 피고 기묘한 돌과 돌 사이로 흐르는 물이 있다. 높이 나는 새, 바위를 뛰어다니는 짐승들이 있다. 그리고 거기 이질적인 존재로 우두커니 앉아있는 자기 자신 - 인간도 있다. 이 책은 인간이 싫어 산에 숨었다가 산을 사랑하게 된 인간의 이야기다. 동시에 산을 사랑하지만 인문학자로서의 본능을 버리지 못한 자연 외의 존재인 인간이 산을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하다. 신으로 숭상 받았던 고대로부터 현대의 파괴 - 인간은 창조하기도 하지만 파괴에 더 능하다. 산을 모두 밀어붙이고 지구를 평평한 대지로 만들고 말 기세니 -에 이르기까지 산을 향한 인간의 몸부림을 서술한다. 산은 거기 있었을 뿐이나 불행히도 인간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산을 밀어 없애 길을 닦고 마을을 만들지라도 결국 이 행성의 마지막 날, 산은 있어도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행성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니까. 마지막 인간이 사라지는 날, 거대한 나무는 바람에 잎사귀를 뒤집겠지. 나무에 인간의 목소리를 입히는 망상을 허락한다면 나무의 혼잣말이 들리는 것 같다. 내 그럴 줄 알았지,라는 조그마한 탄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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