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윤호 시집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

by 별이언니


저 탁자를 비워둔 적이 없었는데

그 위의 물건들은 대부분 버렸다

쓰임새가 존재를 가리는 삶

어둠 속에 혼자 남았을 때

사람들은 내게서 무엇을 기억할까


- 전윤호 <문을 닫으며> 중



캡처.png


오래전 수몰지구 옆을 지나간 적이 있다. 저 아래 마을이 잠겨 있어 -라는 말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검고 푸른 물웅덩이가 있었다. 얇게 편으로 썬 햇빛이 내려앉아도 물은 몸을 열지 않았다. 한동안 물 곁에 서서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멀리 잎사귀 하나 달리지 않은 나뭇가지 하나가 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 날개가 검은 새가 잠깐 앉았다가 깃을 털고 날아갔다.


조금이라도 속을 보여줬더라면 아마 금방 잊었을지도 모르는데, 기어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오래 생각했다. 물속의 집, 물속의 저녁 식사, 물속의 마당, 물속에 피는 꽃, 물속의 가족들. 기름진 물은 캄캄하게 이야기를 가두고 나는 잠들기 전 눈을 감고 캄캄하게 떠올렸다. 저렇게 검은 물 아래엔 늘 밤일까. 사람의 발길이 끊기는 늦은 오후녘 물이 잠깐 열리면 햇빛 몇 줌 스미고 그럼 그 빛을 물방울에 넣어 알전구처럼 천정에 달고 책도 읽고 바느질도 하려나.


시인이 사는 곳 근처에도 물에 잠긴 마을이 있어 자전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며 오래 생각하나 보다. 이곳의 물을 가둬 먼 곳의 사람에게 보내는 일을 생각하며 어느 시간에 멈춰있나 보다, 생각하며


하늘을 보니 저기 푸르게 찰랑이는 물. 아아, 우리도 커다란 물 아래 잠겨 한시절을 보내고 있구나. 손바닥에 떨어진 햇빛을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빛에 기대어 책을 읽고 편지를 쓰고 당신을 생각해야지, 가만히 중얼거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자크 엘리제 르클뤼 <산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