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 에세이 <나의 딸의 딸>

by 별이언니

"우리 집 현관은 내 신발과 아내의 신발만이 놓여 있던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러다가 다혜의 꼬까신이 놓이고 어느 날 도단이의 운동화가 그 곁에 놓였다. 아이들의 신발 문수가 점점 더 커지더니 어느 날엔가 우리 집에 새로운 신발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사위 민석이의 것이었다. 소도둑처럼 크나큰 신발이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엔가 나의 딸이 낳은 정원이가 가족의 뉴 페이스로 등장하였다. 정원이의 신발은 그야말로 '꽃신'이었다."





어렸을 때. 휴일에 동네 놀이터에 나가 놀고 있으면 해 질 무렵이면 집집마다 대문이 열리고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동네 가득 울려 퍼졌다. 누구야, 밥 먹어라. 누구야, 그만 놀고 들어와라. 고집 센 몇몇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뭉그적거리고 있으면 부엌에서 바쁜 엄마 대신 아빠가 나와 손을 잡고 데려갔다. 누구야, 잘 놀았어? 그만 놀고 저녁 먹자.


우리 집은 저녁 먹는 시간이 조금 늦어서 나는 언제나 놀이터 꼴찌였다. 아이들이 따뜻한 저녁 식탁 앞으로 지지배배 웃으며 떠나고 놀이터엔 노을과 나만 남아서 마지막 그네를 탔다. 발을 구르면 높이 더 높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고집을 피워도 데려갈 아빠가 없어서 시간이 되면 얌전히 그네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갔다.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자랐지만, 놀이터 그네에 앉아 보던, 아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옆집 친구의 나지막한 뒤통수는 오래 기억한다. 아빠라는 사람의 넓은 등도. 남의 감정엔 민감하지만 정작 내 감정은 멀리 밀어두는 버릇은 어렸을 때부터 있어 슬펐는지 외로웠는지 그런 강렬한 느낌은 없지만,


만화처럼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갈 수 있다면 그때 그네에 가만히 앉아있는, 조그맣고 마른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내가 너를 사랑해,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해. 속삭이고 싶다.


선생은 따님이신 다혜를 집의 수호신처럼 섬기며 사랑하셨고 손녀인 정원이에게서 천국의 풍경을 미리 보셨으니


사랑으로 충만한 아버지와 딸은 그야말로 행복한 일. 비록 집집의 모습은 모두 달라도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저마다 지극한 사랑으로 자라니


밥을 먹으며 가슴 앞에 손을 모은다. 감사해요, 아버지. 감사해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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