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by 별이언니

"하지만 여기에는 이미지에서 벗어난 단순한 안도감 외에 또다른 것들도 작용한다. 오늘 아침 일찍 나는 강에 배를 띄우고, 청명한 8월 말 하늘 아래 강을 거슬러 오르며, 배의 리듬에, 수면에 부딪혀 반짝이는 햇빛에, 노가 물을 가르는 느낌에 넋을 잃고 몰입했다. 나는 스스로 강하고 유능하다고 느꼈고, 내 몸이 내가 가르친 대로 움직인다고 느꼈다. 그리고 계속 노를 저으면서 나는 내 팔을 생각했고, 힘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생각했고, 내가 여성의 몸매와 체형을 규정하는 표준 방정식을 거스르는 데 이 스포츠가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를 생각했다. 평소 내 팔은 스웨터나 긴팔 옷에 싸여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가려져 있다. 나는 팔을 내보이지 않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내가 내 팔에서 느끼는 만족은 전적으로 사적인 것이고, 이 점이 그 만족감을 특히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몸매에 관한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나 자신의 열정과 어떤 일을 할 줄 아는 능력들에서 비롯한 미적 기쁨, 안에서 나와 밖으로 드러난 아름다움. 날개가 된 나의 팔, 이것이 바로 해방의 정의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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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라인 냅의 글은 매력적이다. 거기엔 다 늘어진 잠옷을 입고 침대에 반쯤 기대앉아 정크 푸드를 먹으며 강박적으로 책을 읽는 내가 있다. 나의 머리속을 달리는, 불에 달군 구두를 신고 미친 듯이 뛰는 목소리가 있다. 자, 잠을 자라고, 어서 눈을 감아! 눈이 따끔거리고 속이 메슥거려도 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긴다. 내 삶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릴 때 내가 강박적으로 몰입하는 것들이 있다. 끝없이 책을 읽고, 물처럼 커피를 마시고, 잠을 자지 않고, 창을 열지 않고, 집에 틀어박히는 일. 그건 건강한 고독이 아닌, 고립을 자처하는 것이며 캐럴라인의 말을 빌리자면 안전한 곳으로 숨는 일이다. 나의 고치 안에서 나는 안전하다, 고 믿고 싶다. 불타는 줄을 타는 것처럼 내 머리속을 달리는 외마디 비명을 제외하면.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나는 중독자입니다, 라고 고백할 용기는 없다. 그러나 우리 중 누가 중독자가 아닐 수 있을까. 우리는 평원을 걷듯 살고 싶지만 실제로 우리가 건너는 시간은 폐허와 정글과 홍수다. 수라장을 뚫고 나가기 위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보호한다고 믿기 위해), 우리에겐 방어기제가 필요하다. 발이 부르트도록 걷거나, 몸이 아플 때까지 운동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술에, 때로는 굶고 때로는 폭식하고, 이어달리기처럼 질나쁜 연애에 목을 메고, 리본이나 고무줄을 모으고, 사람들의 애정을 갈구한다. 우리 머리속에 저마다 있는,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주입된 폭력적이지만 강력한 이미지에 휘둘리며 어여쁘고 멋있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 틀에 강제로 나를 끼워맞춘다. 캐럴라인은 신랄하게 (웩) 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말한다. 나는 중독자였고 지금도 중독되었어, 아프고 싶지 않았고 잃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아팠고 잃었어, 나는 용감하게 나아가고 있지만 가끔 무너져, 왜 그게 어때서?


왜 그게 어때서? 맞다, 철이 바뀌면 터질듯한 옷장을 아무리 뒤져도 입을 옷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캐럴라인은 명랑하게 이 현상을 '자연발생적 옷장 기능상실 증후군'이라고 이름붙였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어머니를 사랑했다. 일년 몇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양친을 잃는 일은 누구라도 힘든 일이다.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그녀는 술을 마셨다. 블랙아웃이 될 때까지. 그리고 빠져나왔다.


그녀가 중독에서 빠져나올 결심을 하는 부분을 읽으며 나는 거의 울었다. 보호하기 위해서 삶을 상실하는 것을 더이상 이어가지 않겠다고, 내 삶을 명료하게 마주보고 거기서 몰려오는 모든 감정들을 생생하게 느끼겠노라고. 그건 '진정한 살아감'을 결심하는 것이었고 두렵지만 성장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힘든, 그래서 정말 위대해보이는 실천.


수많은 중독으로부터 하나하나 빠져나올 때마다 그녀는 새로운 중독을 발견한다. 우리 삶이 그렇다.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는 중독 - 알콜이나 줄담배, 거식증 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 - 이 사라지면 보다 사소하지만 그만큼 빠져나오기 힘든 습관적 중독들이 드러난다. 도대체 중독없는 삶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묻고 싶다. 특히 21세기의 도시에 사는 우리라면.


캐럴라인 냅은 마흔 두 살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하나하나 끊었지만 결국 끝까지 끊지 못했던 담배가 그녀의 폐를 병들게 했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없다고 선언했지만 죽기 한 달 전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혼했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명랑했고 용감했다. 그녀의 마지막 중독이 사랑(연인과 개)이었다니,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이렇게 쓴다면 캐럴라인은 픽 웃을지도 모르지만) 이 명랑한 은둔자가 이 세상에 더이상 없다는 것이 슬프다. 그녀는 정말 좋은 글들을 계속 썼을테고, 나는 행복하게 그녀의 글을 읽었을 텐데. 옮긴 이의 말처럼 나도 캐럴라인의 글이 필요하다. 나의 슬픔, 상처, 트라우마, 거기서부터 도망치기 위해 내가 기어들어가는 모든 구멍들, 나는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그녀의 글을 읽었을텐데. 그렇게 나의 삶에 있는 둔덕을 지나왔을텐데.


아쉽다. 하지만 캐럴라인의 글이 여기 있으니까. 나는 안심이 된다. 캐럴라인은 달갑게 여기지 않을지 몰라도 그녀의 글 또한 내게는 중독이니까. 도움이 되는 중독. 내 인생의 치어리더 중 하나니까. 나를 삶으로 밀어주는 다정한 중독들이 있다. 나의 글도 누군가에게 그러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겠지만,


은둔자들의 명랑한 네트워크 속 나의 수줍은 이웃들이여, 오늘도 무사히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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