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 시집, 끝을 시작하기

by 별이언니


"나는 목소리 수집가가

되었다 유난히 을씨년스러운

눈이든 비든 금방이라도 쏟아

질 것 같은 그런 날씨를 골라 나는

거리를 배회했다 그런 날이면

길모퉁이 어둠침침한 구석 쯤에

웅크린 사람 하나쯤은 있게 마련

나는 한 번도 그런 사람들을 그냥 지나친

적은 없다 눈치채지 못하게 재빨리

그자들의 목소리를 훔쳐 목에 걸었다

목소리로 엮은 목걸이에선 치르렁

치르렁 목소리들이 흔들렸다 나는

그 중 하나를 골라 내 목소리로

삼곤 했다 간혹 골목을 지나다

담장을 넘어오는 목소리를 얻게

되는 운 좋은 날도 있긴 하나

그런 목소리는 꼼꼼히 살펴야 한다

너무 슬프거나 우울한 목소리는

금방 상해버리기 일쑤이다

잔뜩 화가 난 목소리가 담을

넘어와 들러붙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

목소리의 주인이 봉두난발로

쫓아오기도 한다 부리나케 줄행랑을

치지 않으면 다른 목소리마저

빼앗길 위험이 있다 사람의

말을 하지만 짐승을 애써 벗어나지

않은 짐승의 목소리도 있긴 있을

것이다 어쩐지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당신만 같다"

<에필로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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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억 경의 아득한 줄이 달린 마리오네트가 있다. 그건 춤추는 암흑이다. 제멋대로 흐르고 엉기고 물크덩거리며 우주의 수챗구멍으로 향하는 짐승의 토사물. 그건 비명이고 아우성이고 폐허이고 불꽃의 기억이고 홍수의 흔적이고 신화의 배꼽이고 버려진 태반이다. 그러나 그건 마리오네트. 정교한 손가락이 난장의 끝자락을 들어 올린다. 우아하게 연주되는 무질서. 완벽한 힘의 들고남. 김근의 언어는 그렇게 유일무이하다.


어느 날 시인에게 찾아온 짐승 한 마리와 시간을 보냈다. 짐승이 깃들어 목소리를 잃고 아 하면 어 하는 반응이라도 오기를 기다리며 퇴화된 감각으로 저 바깥에 말을 거는데,


그건 퇴화된 감각인가, 갓 태어난 감각인가, 빼앗긴 감각인가.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말을 시작하자 말은 넝쿨이 되어 흘러간다. 유장한 노래, 유장한 웅얼거림. 나는 더듬거리며 말을 따라갈 뿐이다. 시인의 우주에서 방랑하는 자는 불청객이고 이물질이지만 혹여 이것도 그가 의도한 질서가 아닐까. 끝을 시작하기. 종말의 날에 석판에 적혀 과거로 던져질 법한 말 앞에 오래 앉는다.


우주의 시작은 셀 수가 없어 그 끝도 무한하며 그래서 우리의 우주는 여러 겹의 차원으로 흩어진 무엇이라는데,


끝을 시작하는 일은 이 우주의 유일한 명제일지도 모른다. 그럼 그의 유장한 언어는 완전한 진실에 닿아있는 것.


인간의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일. 시인은 그래서 그것을 한계이며 실패라고 말하고 청맹과니 독자는 더더욱 실패할 뿐이지만


이 언어는 매혹이며 시는 아름답고 기이하니 기어이 더듬어 나아갈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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