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살아라, 말 곱게 해라, 울지 마라, 말대답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싸우지 마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런 얘길 들어서 난 내가 화가 나도 슬퍼도 죄책감이 들어. 감정이 소화가 안 되니까 쓰레기 던지듯이 마음에 던져버리는 거야. 그때그때 못 치워서 마음이 쓰레기통이 됐어. 더럽고 냄새나고 치울 수도 없는 쓰레기가 가득 쌓였어.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 나도 사람이야. 나도 감정이 있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음이 베였다. 한 문단, 한 문장이 마음을 긋고 지나갔다. 피를 펑펑 쏟지는 않아도 물이 닿으면 쓰라린 상처.
책을 절반쯤 읽었던 일요일 아침, 새치염색을 한다고 미용실에 갔다. 머리를 감느라 의자에 반쯤 누웠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얼굴에 물이 튀어도 젖지 말라고 얇은 종이를 올려두어서 다행이었다. 종이에 눈물이 번져도 물이 튄 것으로 생각할테니. 눈물은 짜고 뜨겁고 짙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진물이 흐르는 것처럼.
좁은 산도를 지나 세상으로 기어나오면서 우리가 마주하는 첫 감정은 무엇일까. 공포? 두려움? 막연한 ··· 어둠?
골반을 활짝 열어 진땀과 신음으로 아이를 세상에 밀어내는 어미의 마음은 또 어떨까? 기대? 기쁨? 그저 고통? 막연한 ··· 미안함?
따뜻한 양수에서 흘러나와 폐를 찌르는 싸늘한 공기에 첫 울음을 터뜨린 아이는 이미 감정의 거미줄에 걸려 있다. 아이를 둘러싼 온갖 마음들이 말랑하고 연약한 생명을 삼킨다. 인간의 아이는 더디 자란다. 인간의 어미 아비는 아이를 키우느라 오랜 세월을 보내야 한다. 가족은 마모된 감정의 집합체다.
현관에 위태롭게 놓여 있던 화분을 기억한다. 비가 많이 오던 날, 현관이 화분에서 흘러나온 흙으로 끌탕이 되어 있었다. 모서리가 깨진 채 흙이 흘러나오고 있던 화분을 살펴보았다. 길게 자란 뿌리가 깨진 틈으로 나와 있었다. 뿌리는 가늘고 휘어져 여기저기 다쳤다. 뿌리가 화분을 깼나, 깨진 화분에 뿌리가 다쳤나.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 화분이 떠올랐고 불을 끄고 앉아 오래 생각했다.
삼천의 치마를 그러쥐었다가 이내 놓아버린 병든 어미는 삼천의 소망처럼 자궁을 빌려 딸로 태어났을까. 딸들은 모두 죽은 어미를 닮았다. 자궁은 대속의 우주인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우리는 사랑으로도 서로를 할퀴고 사랑인 척 하며 서로의 목을 조른다. 이 비좁고 끈끈한 연대에서 터득한 생존법은 대체로 느리게 죽어가는 법이다.
그러나 이 백야의 방에도 희망은 있어,
후회하고 절망하고 상처입고 상처입히고 결심하고 다시 후회하면서 용서하고 위로하고 끌어안고 회복하는 일은 온다. 세대를 건너서, 저승을 지나.
모든 그리운 얼굴들을 불러,
꿈의 바다에서 치마를 걷고 오래,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