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침묵하는 나무들뿐이다.
이 기슭에 우리를 밀봉하려는 눈뿐이다."
바깥에는 젖은 눈이 흩날리고 있다. 책을 덮고 일어나 창밖을 본다. 캄캄한 숲은 없다. 불탄 자리도 없다. 하지만 저 어딘가 부러진 뼈들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 이름도 사연도 뒤엉킨, 고통스러운 사랑이 켜켜이 쌓여 짓누르는 흙과 돌과 눈을 걷고 해 아래 희게 드러나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 어디 울며 숨죽이며 가슴을 두드리며 콩, 콩, 콩, 작별할 수 없는 누군가의 흰 손을. 살과 피와 근육이 다 녹아버리고 앙상하게 바스러지는 뼛조각들에 닿을 체온을.
작별할 수 없다. 작별하지 않는다.
새는 구멍 난 뼈로 날아 숲을 건넌다. 저승을 건너와 부리에 문 이름을 건네준다. 서양에서는 새로 태어날 아기를 학이 물어온다고 했다. 길흉을 예언하는 울음소리가 있었다. 새는 소식을 전하는 영물. 그러므로 캄캄하게 묻힌, 생사가 불분명한 경계에서도 불현듯 날아올지 모른다. 더 이상 수그릴 수 없을 때까지 고개를 수그리고 체온을 탐할지도 모른다.
시종일관 눈이 내렸다. 깊이 쌓이고 사방을 지워버리는 눈이. 그런데 허공은 어째서 저렇게 가벼운 눈송이를 낳나. 마치 허공 어디에서 헤매던 호명이 이윽고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눈은 덧없이 아름답다. 발자국도, 새무덤도 모두 덮는다. 눈은 가득히 쌓여 ··· 아득하다.
내가 죽어가고 있는 것인지 마주 앉은 인선이 죽어가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손가락 한 마디 - 인선이 잃어버린 그 손가락 한 마디 - 만큼의 촛불에 기대 떨며 읽는 명부에 어느덧 깃든 것인지. 모른다. 육체의 고통을 지우고 먼 옛날 영문도 모르고 총에 맞아 죽은 젖먹이, 어린아이, 아이를 밴 여자, 누구의 아들, 누구의 누이, 누구의 어미 아비 오라비 ···의 핏방울에 손을 적신다. 그 기록까지 건너가면서 인선과 경하는 발자국도 겹치지 않는다. 몸도 스치지 않는다. 인선이 흘린 핏자국을 경하는 밟지 않는다. 그렇게 온전한 몸으로 작별할 수 없는 어떤 사랑 앞에 가 앉는다.
그 몇 년 동안, 그 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헤아릴 수도 없고.
바다를 건너 어느 마을 들판과 동굴, 탄광과 해안, 골짜기로 흘러넘친 죽음을 짐작조차 할 수 없고.
그 모든 죽음에는 살아남아 기다리는, 기어이 작별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등신대의 나무를 심는 일, 죽은 이들을 하나하나 불러와 나무에 덧씌우는 일, 아무리 기록해도 미진한 것을 알고 멈춘 경하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밀고 나간 인선이 있다. 인선과 경하는 어느 경계에 들어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인선의 죽음 언저리에 경하가 끌려들어 간 것일까. 체온을 잃고 빈집에 고립된 경하의 죽음 언저리에 인선이 찾아온 것일까. 아니면 새가, 새가 둘을 데리고 어느 어스름으로 데려갔나. 알 수 없지만,
작별하지 않는 기록을 사이에 두고 불이 꺼졌을 때 아마도 날이 개고 눈이 그쳤으리라. 바람이 불어 나무는 더 이상 부러지지 않고 햇빛에 눈이 녹겠지. 끝나지 않는 눈보라는 없다. 문은 열린다.
우리도 작별하지 않는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사랑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