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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휘돌아온 이 매력적인 스튜에는 내가 좋아하는 요리의 거의 모든 요소가 들어가 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명상을 닮은 밑 준비 작업(양파 볶기 한 시간), 주재료 선택의 가변성(고기, 해물, 비건 등으로 옵션 변경 가능), 자투리 채소 활용(중요), 창의력을 요함, 다양하게 변주 가능. 숙성과 함께 엮이며 더없이 섬세해지는 맛과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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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에 대한 열두 개의 메모> 중
책장을 넘기자 싱싱한 토마토를 자르면 나는 가벼운 향이 공중을 떠돌았다. 말간 오후의 남은 햇빛처럼 유자의 달큼한 내음이 감돌았다. 밤을 닮은 향긋한 럼의 향기가, 손바닥으로 문지르면 옅고 넓게 퍼지는 멍처럼 가지의 물크덩한 냄새가 코를 가득 채웠다.
우울은 왜 항상 위로 오는가. 나는 어젯밤 드디어 위가 멈췄다. 고장 난 공룡 장난감처럼 화를 뿜어내다가 지쳐서 잠들었는데 새벽에 기어이 위가 고장이 났다. 하루 종일 굶다가 어지러워 흰죽 반 그릇을 먹었다. 달걀 장조림의 달고 가벼운 간장을 따라와 심심한 밥에 간을 더했다. 죽을 좋아하지 않지만 꼭 먹어야 한다면 흰죽을 택한다. 물과 밥만 있는 덩그레함을 사랑한다. 쌀이 뭉그러지면서 설핏 내어놓는 단맛을 혀 위에 올려둔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지극한 사람이다. 오래 기다려서 깊이 슬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친구들이 둘러서서 웃고 떠드는 두어 시간을 위해 하루 종일 아니 며칠을 냄비에 무엇을 넣고 조리는 사람은.
나는 시인의 옥탑으로 올라간다. 계단을 하나 오르며 슬픔으로 하나 내려간다. 계단을 하나 오르며 고요로 하나 내려간다. 정갈하게 장만한 밥상을 앞에 두고 고독한 만찬을 즐길 수도 있으련만 시인은 언제나 식탁에 마주 앉는 사람을 생각하며 음식을 만든다. 시인의 음식은 동그랗다. 마주 잡은 손이고 맞닿은 어깨고 고백이고 다정이다. 모든 계절의 빗방울이 시인의 허브를 키우고 모든 계절의 햇빛이 시인의 토마토를 물들인다. 슬픔으로 위가 멎은 나는 시인의 향기로운 숲으로 초대받는다. 잔볕이 기우는 부엌의 훈내 속으로.
향도 맛도 없는 흑백의 하루를 마감하고 가만히 웅크린 나에게 세상의 모든 모서리가 뭉그러지며 비로소 완성되는 스튜 한 그릇을 놓아준다. 식재료들이 왕성하게 자라는 계절은 여름이므로 시인의 음식들도 대부분 여름을 닮았지만 긴 겨울밤, 한 해를 달려온 모든 색들을 보글보글 끓여 냈으니 맺힌 것들도 저절로 풀린다. 책 한 권이 보약이니 내일은 몸이 더 가볍겠다. 시인이여, 고맙습니다. 재료를 다듬고 불 위에 올려서 정성을 다해 차린 한 그릇의 문장으로 내 병이 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