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년 동안 전쟁을 겪으면서 처음으로, 살육과 기아와 황폐해진 도시들을 누빈 그 잔인한 여정의 끝에서 처음으로, 나는 신성하고도 거룩한 외경심이 담긴 '피'라는 말을 들었다. 유럽 곳곳에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폴란드, 러시아, 핀란드에서 그 단어는 증오와 두려움과 멸시와 짜릿함과 공포와 잔인하고 야만적인 오만과 감각적인 쾌락을 의미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공포와 혐오에 몸을 떨었다. 내게 '피'라는 단어는 피 자체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 나는 피를 직접 만질 때보다, 유럽 곳곳에서 뿌려진 그 가엾은 피에 두 손을 흠뻑 적실 때보다 '피'라는 말을 들을 때 더 오싹했다. 그런데 나폴리에서, 다름 아닌 이 나폴리에서, 유럽에서도 가장 불행하고 가장 기아에 시달리고, 초라하고, 버려진, 고문당한 도시에서, 나는 종교적 외경심이 담긴 '피'라는 단어를 들었다. 거룩한 존경과 깊은 자비가 나폴리 사람들 특유의 높고 순수하고 여리고 천진한 목소리를 통해 느껴졌다. 엄마, 아기, 하늘, 성모, 빵, 예수라고 말할 때의 바로 그 천진함과 순수함과 소박함이었다. 그 이빨 빠진 입에서, 그 창백하고 피곤한 입술에서 "오, 상궤! 오, 상궤!" 하는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호소 같기도 하고 신성한 이름을 부르는 소리 같기도 했다. 기아와 굴종을 강요당하던, 야만이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왕 노릇 하던 오랜 시간도, 궁핍과 전염병과 부패가 판치던 그 오랜 세월도, 저 초라하고 고귀한 민초들의 피에 대한 종교적 외경심을 완전히 끊어놓지 못했다. 그들은 비명 지르고 울며 두 손을 하늘로 뻗친 채 대성당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은 놀라운 황홀경 속에서 피에 대한 신의 가호를 간절히 빌었다. 그들은 낭비된 피, 헛되어 뿌려진 피, 피로 적셔진 대지, 피로 물든 누더기, 길거리의 먼지를 뒤집어쓴 인간의 소중한 피, 교도소 담벼락이 말라붙은 핏덩어리를 서러워하며 울고 있었다. 군중들의 그 열띤 눈에는 일종의 연민, 일종의 종교적인 두려움이 스며 있었다. 그들은 손을 하늘 높이 쳐들고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오, 상궤! 오, 상궤! 오, 상궤!"
기이한 기분이었다. 인간의 손으로 저지른 비극이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어느 시간에 이르면 그 고고하게 흘러가는 비극 앞에서 술을 마시고 음식을 나누는 인간이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그 모든 비극을 굴종과 찬양으로 덧씌우는 입술이 막 자른 사슴고기에서 흘러나온 육즙으로 흥건할 때,
식탁 위의 사슴이 죽었는가, 눈을 번득이며 모든 죽음을 부정하는 저 인간이 죽었는가.
긴 전쟁의 불길이 외롭게 외치며 세상의 끝까지 달려갔다. 개들은 살아남았다. 머리에 총을 맞을지언정 나치 장교의 낚시에는 굴복하지 않는 연어들도. 백야의 숲을 노루떼가 달리고 귀부인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죽음이라 찬양했던 나비도 거울 속으로 날아갔다. 군복을 벗기면 금방이라도 물이 되어 바닥에 쏟아질 것 같은 희멀건한 시체들이 활보하는 세상. 수송 열차의 문을 열자 질식사한 수천 구의 시체들이 쏟아지고 그럼 그들의 옷가지를 벗기려고 기도도 없이 군중들이 덤벼드는 세상. 집에 가고 싶다는, 부드러운 입술을 겨우 움직이는 유대인 아가씨들이 이십 일의 지옥을 나오면 강에 뜨거운 피를 쏟는 세상. 이 세상에서는 유일하게 인간만이 죽어 있다.
지옥에 빠진 인간은 이렇게도 지독한 것인가. 책을 읽는 내내 몸서리쳤다. 죽음만이 구원이라며 술잔을 부딪치는 점령국의 군인들을 바라보고 눈을 돌리면 폐허가 된 마을을 둘러싼 밤이 있다. 어떻게든 벗어날 수 없는 비극 속에서 동조하지 않지만 거부할 용기도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술에 취하고 반항적인 건배사를 외치고 수용소의 난민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는 것뿐이다. 그의 한 조각 양심은 이런 기록을 남겼지만, 이것이 그의 양심일까. 시체가 되지 않기 위해, 죽음의 시대를 살아서 건너기 위해 몸부림친 것일까. 그도 아니면 그저 예술가의 허영심일까. 그는 파시스트 장교였기에 모든 전장에서 살아남았고, 기자이자 작가로서 금기된 기록을 남겼기에 감옥에 갇혔다. 썩은 피가, 굳어서 흐르지도 않는 피가 담긴 커다란 잔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그는 정신이 함몰되지 않도록, 영혼이 더 이상 망가지지 않도록, 폐가 굳지 않도록, 이 전쟁의 끝에 살아서 이르도록 안간힘을 썼다. 그는 죽은 자들이 활보하는 세계에서 절망했지만, 낫지도 잊지도 못할 상처를 입었지만 너머를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에는 인간성이 살아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세계는 망가졌고,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그 시절보다 더 무서운 시체들의 시간을 우리는 산다. 말라파르테의 지옥의 이웃들은 죄의식이든, 동정심이든, 광기든, 포기든, 그 무엇이든 기꺼이 함께였다. 그들은 망가진 세계의 부속이었고, 톱니바퀴에 휘말려 기형이 되면서도 밤과 낮을 걸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 걸어 다니는 시체 노릇조차 포기한 것이다. 탁류가 되어 흐르는 비극의 강물에 총을 쏘는 처절한 광기조차 없는 고요. 좀비의 시간조차 저물고 우리는 붉은 녹이 번지는 황폐를 산다. 그가 나폴리에서 들었던 "오, 상궤! 오, 피!"라는 육성은 메아리의 그림자조차 사라진 걸까.
이 죽음의 골짜기를 맨발로 걸으면 나비 하나가 꽃잎처럼 떠오른다. 부서져 가루가 된 세계 위를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나비. 나비는 죽음이며 동시에 경계이다.
나는 나비를 따라간다. 불구의 육체들이 고통에 비틀려 신음하는 동굴을 찾아. 신성한 피를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를 찾아.
이곳이 시체의 진열소라 해도,
인간이란 희망을 버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