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by 별이언니


존재보다 부재가 넓고, 존재의 나보다 부재의 내가 많고, 그 부재 중 하나가 존재자 나를 잠깐만 스쳐도 내가 부재자가 된다는데, 부재자 내가 존재자 나를 밖에서 잠깐만 바라봐도 존재자 내가 부재자 내가 된다는데, 이 세상은 부재가 지배하고 있고,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다만 나의 공상일 뿐이라는데, 정말 나도 그런 것 같을 때가 있는데. 정말 나에게 레모네이드의 레몬처럼 부재의 촉수가 내장을 흐를 때가 있는데. 그럼에도 부재를 믿어야 진짜 믿는 거고, 존재자 나는 부재자 나를 항상 살피고 있어야, 오래, 존재하는 나로 이 세상에 거주할 수 있다는데


<모래의 머리카락> 중





아주 오래 시에게 말을 건 사람은 알게 된다. 어느덧 모든 발화는 시를 통해서만 자연스럽다는 것을. 인간의 세상에서의 모든 말과 행동은 목각인형처럼 삐거덕거린다. 하루 종일 먼지처럼 쌓인 감정들을 입술을 오므리고 시에게 털어놓을 때, 비로소 구깃구깃 접힌 팔다리가 펴지고 폐는 꽃처럼 피어난다. 활짝, 왼쪽 날개 활짝, 오른쪽 날개.


그러니 인생의 모든 순간을 시로 이야기하는 것은 시인에게는 가장 진지한 삶의 태도다. 태어나 열심히 늙어가는 것은 결국 다시 기저귀를 차고 자식의 자궁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일이다.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인생은 시작과 끝이 이어진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병들고 그 옆에서 부모의 시간을 가만히 떠올리며 시인은 비로소 알게 된다. 부재가 있어서 존재가 성립한다는 것을.


세상으로부터 서서히 지워지는 사람이 있다. 그의 육체가 병들고 쇠락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를 기억하는 이들과 그가 기억하는 것들로 이루어지는데 주어진 시간의 끝에 다다르면 기억은 조금씩 부스러진다. 다섯 살이 되어 벙긋 웃는 엄마는 딸을 낳았던 기억조차 잃어버렸다. 그런 엄마의 자궁을 빌려 태어난 딸은 출생의 기억이 사라짐으로써 유령 같은 무엇이 된다. 유령 같은 무엇이 되어 거품처럼 발화한다. 시가 된다. 시는 유령 같은 무엇을 세상에 이어주는 매듭. 지워지는 인간을 실체하게 하는 역설.


평생을 시와 이야기한 사람은 결국 시의 일부가 되어버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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