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로서는 소설 쓰기가 나를 치유해 주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요. 소설을 쓰는 일은 치유보다는 나를 넘어서는 일에 가까우니까요. 대신에 노트에다가 뭔가를 쓰는 일은 도움이 됩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노트에다 손으로 뭔가를 쓰면, 그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쓰게 되면 마음이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날마다 일정 분량의 글을 쓰는 일은, 신경안정제를 먹는 일보다 더 좋아요. 그게 무슨 내용의 글이든. 그때는 손으로 쓰시길.
<치유된다는 것> 중
머리카락을 자르며 이 책을 읽었다. 상한 머리카락을 다 잘라내려면 삭발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클리닉도 부탁드렸다. 단백질이 빠져서 끝이 갈라지고 푸석한 머리카락은 위독한가. 클리닉을 다른 말로 영양이라고도 한다. 내가 먹는 밥과 술이 살과 피와 뼈를 돌보는 데에도 턱없이 모자라 머리카락에는 닿지 못했나 보다.
미용실에 오면서 지나친 향수가게에서 시향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머리를 감으러 자리를 떠날 때마다 읽던 페이지에 시향지를 꽂아두었다. 젖은 머리를 털고 다시 무언가를 바르고 뜨거운 김 속에 갇혀서 책을 펼치면 은은한 향기가 올라왔다. 책 속의 사람은 내가 서른이 되었구나, 하며 캄캄한 밤의 호수에 서 있는데 문득 가슴 복판이 무너졌다. 너무 오래 익혀 흐물거리는 반죽처럼 무너져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망연자실 들여다보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서른을 언제 지나왔는지도 모르는데. 아, 나는 슬프구나, 위독하구나.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오래 슬퍼서 망가졌구나. 그럼 이 마음을 도려내야 하나. 이슬이 사라지기 전에 모은 만나를 먹으며 광야를 건너야 하나.
매번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 소설에 패배하는 작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쓴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날을 살 수 있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는 결코 타인을 알 수 없기에 처음부터 이것은 불가능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는 말에 밑줄을 그었다. 그러므로 독서란 텍스트와 틈 없이 달라붙어 나를 바라보는 일이라는 말에 또 밑줄을 그었다.
우리가 저마다 막막한 심정으로 꼼짝할 수 없었던 풍경은 다르겠지만, 빛 한 점 들지 않는 밤의 호숫가에 선 겨우 서른 살의 청년에게서 먼 나라의 오렌지 나무 향기가 났다. 나는 또 이렇게 아무렇게나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쓴다. 매일 무언가를 쓰고 있기에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손으로 쓴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누구나 부서져 있지만 그 사이로 빛이 새어들어온다는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말처럼
우리는 저마다의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 각자 필사적으로 망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결락이 결코 아프거나 나쁜 것이 아님을 작가는, 아니 작가의 문장들은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거운 청춘을 지나는 마음에게 연결되는 문장들이 있어서 밤은 지나고 또 아침은 오는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