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by 별이언니


Y 씨가 말했다. 그와 Y 씨는 벌써 한 시간째 걷고 있었다. 아홉 번째 친구와 산책을 한 뒤, 그의 목록은 끝에 도달했다. 그는 앞면에는 걱정하는 일들의 목록이, 뒷면에는 절친한 친구들의 목록이 적힌 A4용지를 책상 한쪽에 던져버린 뒤, 이제는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를 들여다보며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저는 영화감독...... 하하하, 그냥 얘기 좀 하려고요. 한 번이라도 안면이 있거나, 혹은 다시 일을 시작하려면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들에게. 서민들이 보기에는 너무 예술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 그런지, 그냥 얘기나 하자는 말에 전화를 받은 사람들은 호의적으로 도와주려고 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그는 "우리 좀 걸을까요?"라고 말한 뒤, 상대방의 눈치를 살폈다. 상대방이 힘들어보면 한 1킬로미터 정도 걷다가 가까운 커피숍으로 들어갔는데, 그런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산책에, 그냥 걷는 일에 굶주려 있었다.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중






소설의 풍경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소설가의 시선에 잡힌 풍경이 소설 속으로 들어와 다시 만들어질 때의 과정에 대해. 안개가 뭉쳐 벽돌이 만들어지고 그늘에서 나무가 자라고 어스름이 점점 색을 입어 선명한 그림이 되는 것일까. 완벽한 허구이면서 너무나 사실적이라 창을 열고 집 앞 골목을 내다보는 것 같은 기묘함. 텍스트 속의 사람이 내쉬는 숨에서 나는 단내가 코로 흘러들고 뿜어내는 온기가 간절해 눈가가 간지러운 일. 소설마다 그 풍경과 사람은 모두 다르겠지만 적어도 김연수의 소설 속 풍경과 사람은 그렇게 친숙하다. 기억도 안 나는 나의 어느 날 같기도 하고, 멀리 소문으로만 듣던 알고도 모를 사람의 사연 같기도 하고, 늦은 밤 막차를 기다리며 옆자리 낯선 이가 내뱉는 이야기를 끊을 수 없어 오줌을 참는 지긋함 같기도 하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을지라도, 양철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미에서 솔이 될 때까지 사월의 천연덕스러운 봄이 가고 지루한 비가 노래하듯 내리는 장마가 끝나듯 가만히 야윈 팔에 둘러싸여 누워있는 시간을 우리는 다 한 번쯤은 지나오지 않았나. 겹겹 천으로 싸고 돌로 눌러 한 치 분간도 안되는 칠흑 같은 독안 어둠에 버린 감정이라도 어느 날 어느 순간 누군가의 막연하고 놀라운 표정 앞에선 생생해진다. 우리는 다 한 번쯤 그런 표정을 마주하지 않았나.

소설은 그 시간만을 베어 놓아둔다. 늙어가지만 영원히 늙지 않는, 낡아가지만 철저히 방부처리된, 지극히 사실적이지만 박물관의 유리함 속에 갇힌 생의 한 토막이 징그럽게 선명하다. 먹먹해서 툭, 눈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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