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은 원고를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출판사 사장에게 원고를 넘기고 이렇게 긴장해 본 적이 있었던가? 한 손에 총을 든 편집자라니. 어쩌면 저것이야말로 모든 편집자가 꿈꾸는 모습이 아닐까? 뺀질거리며 마감을 안 지키는 작가의 집에 들이닥쳐 초고를 탈취한 후 즉결심판을 하는 것이다. 수작이면 살려주고 태작이면 사살한다. 초고조차 안 써놓은 뻔뻔한 작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총살. 탕, 탕, 탕. 마피아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지? '친절한 말 한마디에 총을 곁들이면 좀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
<옥수수와 나> 중
타고난 이야기꾼인 작가에게는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일요일을 게으르게 보내기로 결심했다면 김영하의 소설을 읽는 것이 최고의 선택인지도 모른다. 불편한 자세인 것도 모르고 홀린 듯 읽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허리며 목이 뻐근할 정도니.
여러 편의 소설이 묶인 책을 읽는 것은 어느 시기의 작가를 읽는 것이기도 하다. 이 소설들을 쓰는 동안 그는 어떤 시간을 지나왔나. 그 시간은 분명 나도 지나온 시간이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시간은 심정적으로는 물론이고 물리적으로도 다르다. 달력에 적힌 무정한 숫자와 숫자 사이를 가만히 짚어보는 일이다. 허구지만 완전히 허구는 아닌 누군가의 서사를 읽는 일은.
작가가 잘라 부려놓은 시간 한 토막을 지나가며 나는 업보를 떠올렸다. 생이란 피할 수 없는 인과율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작가가 바라 마지않는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예감했다. 인과율의 칼날은 반드시 온다. 그걸 타오르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느 시간 어느 슬픔 어느 고통을 써야 하는 자의 업보다.
그러나 안심이 되는 것은 모든 이야기의 끝에 시작이 있다는 것. 막연하여 두렵지만 그들은 모두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났다는 것. 지난 시간의 업보를 저승의 강에 씻고 상처투성이 몸으로 되돌아왔다는 것. 작가는 다정하다. 평범한 우리들도 삶의 인과율은 피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다. 다시 나아갈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자 해가 저물고 열어둔 창으로 따듯한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이곳에 앉아 저 지붕들을 바라본 지도 오래되었다.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지붕들도 조금씩 부서지고 불빛의 주인들도 바뀌었다. 하루 종일 책을 봐 아픈 눈으로 나는 바라본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생의 시곗바늘을, 시시각각 닥쳐오는 인과율의 종장을. 지독히도 길고 빽빽한 서사 뒤로 무섭게 펼쳐진 여백을. 막막하지만 그걸
희망이라고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