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비행운

by 별이언니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서른> 중



새 옷을 사면 계절이 넘어가도록 묵혀두는 버릇이 있다. 201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이라는 김애란의 소설집을 나는 10년이 지나 읽는다. 10년 전에도 봄은 오고 꽃은 피었지만 꽃 아래 지나가는 바람의 성질이 달랐듯 10년이 지나 올려다보는 비행운은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사는 일의 관성이라는 것은 사라지지 않지만 질감과 온도는 달라지니까. 여전히 그대로인 삶의 풍경과 지금은 조금 다를 감정의 맛이 낡은 배수관으로 소용돌이치며 흘러들어와 답답하게 머물렀다 이윽고 사라졌다. 눈을 드니 기우는 햇빛이 조그마한 창문으로 들어와 빛나는 먼지구름을 일으키고 있었다.

비행운은 비행기가 지나가면서 남기는 흔적. 이별을 고하거나 다시 돌아오는 일을 약속할 때 쓰는 말들은 어쩜 그렇게도 다르게 들리는지. 세상의 모든 인사가 읽을 수 없는 형태로 새겨진 벽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사람들은 떠난다. 뜻대로 되지 않는 여행에서 적당히 외면하고 있던 서로의 민낯을 발견하면서. 차마 들려줄 수 없는 일기를 쓰면서. 언제부턴지 모르게 비틀리고 휘어진 일정 속에서 돌아올 방법을 잃어버리기도 하면서.

눈을 감고 오래전 말라붙고 창백했던 여자를 부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맣게 입고 눈보라 속에서 돌아오던 여자를. 그녀가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비로소 헤어짐이 시작되었던걸. 너는 늙어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될 거야. 이런 건 질문도 아니니까 답도 없지만.

아무것도 아니다. 상처 주고 상처받고 용서하고 낫기도 하고 어떤 것은 영영 아물지 않기도 하고 잠들지 못하는 밤에 주머니 끈을 풀고 차가운 손가락을 넣어 휘저어보기도 하고.

그렇게 너는 내가 되어간다. 번드르르한 희망도 뼈를 치는 절망도 없다. 극적인 것 하나 없어도 생은 자박 자박 자박. 조약돌이 깔린 길을 걷듯이. 시곗바늘 소리로 지나간다. 입술을 적시는 기쁨도 관자놀이를 쑤시는 슬픔도 다. 피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