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박해지거나 희미해지는 일은 언제나 바람이었다. 사라지고 싶지는 않아도 눈에 띄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구멍이 많은 주머니였다. 병뚜껑 하나 제대로 열지 못하는 아귀힘으로는 무엇 하나 붙잡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문득 코끝을 스치는 향이거나 이마를 어루만지고 다시 몸을 띄우는 산들바람이었으면 했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일이란 의외로 촘촘하고 다정한 것이어서 보잘것없는 정체가 폭로되고 탄로 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 가방을 꾸렸다. 허름한 옷을 챙기고 늘어난 스카프를 두르고 늘 무엇을 하나 잊어버린 채 어딘가로 떠났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선 나는 얼마든지 희미해질 수 있었다. 내가 없는 시간을 만드는 일로 지금 여기의 나도 희박해졌다.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것들, 만져지는 것들만으로도 한도 초과였으니까. 나는 그저 잠시 사라져버리면 그만. 가족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나를 오래 기억하고 궁금해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고는 싶지 않아서 시를 썼다. 작은 블루투스 키보드를 연결하고 낯선 향이 풍기는 차를 마시며 일기를 썼다. 읽는 사람만 읽고 그러다가 읽지 않고 다시 읽기도 하고 영영 안 읽기도 하는, 쓸쓸하고 사무친 언어를. 오래 쥐고 있어서 땀과 체온이 깃든 언어는 빠르게 식어갔다. 나는 그 언어 옆에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세상을 바라봤다. 함부로 뜨거웠으나 무엇 하나 꾸준하지는 못한 감정들이 반짝이며 사라지는 것을 인사도 없이 배웅했다.
더운 나라의 커다란 잎사귀 아래에서 시를 쓰던 시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헤아릴 수 없고 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어렴풋이 끌리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열대의 초록으로 초대하는 듯한 시집의 창턱에. 이 비가 그치면 여름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