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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임 Dec 30. 2023

23.12.30

오늘은 외할머니의 기일. 작년 여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겨울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연세로만 봤을 때는 두 분 다 아흔을 넘기셨으니 호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재수학원을 다니던 여름 끝물 어느 날, 학원에서 돌아오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마루에 앉아 수박을 드시고 계셨다. 신발을 벗고 자연스레 앉아 수박을 베어물고 있는데 외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네 할머니 수술해야 한단다, 그 머리 아픈 것 때문에. 네. 머리에 조그마한 혹이 있는데 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금방 뗀다더라. 네. 수박의 단물이 끈끈하게 흘러내렸다. 두 분은 내 정수리에 대고 너털웃음을 터뜨리셨다. 다 큰 줄 알았는데 뭔지도 모르고 네네 한다, 이 아는. 그리고 영영 외할머니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셨다.

예쁜 치마를 입고 손흔들며 가신 외할머니가 머리카락 하나 없는 흉터투성이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던 날 이후 나는 내내 후회한다. 사실은 너무 무서워서 네, 밖에 할말이 없었던 건데. 스무 살이라고 해도 학교하고 학원만 다녀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뭘 알아서 걱정을 하고 뭘 알아서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냥 심상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수술을 하러 머리를 열었을 때 생각보다 혹이 크다던가, 혹을 잘 뗐다고 생각했는데 출혈이 일어났다던가, 출혈을 잡지 못해 쇼크에 빠졌다던가, 뇌의 일부분이 영원히 손상된다던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그 후로 삼십 년, 두분의 시간은 허물어져가는 조그만 단독주택에 머물러 있었다. 매일 어제와 똑같이 지내려고 애썼지만, 그래서 가위 하나 칼 하나 둔 자리를 옮기지도 않았지만, 무서운 시간은 꽁꽁 닫은 문틈과 벽의 금 사이로 스며들어 두분을 갉아먹었다. 그 사이 온갖 인간사의 음침한 일들이 아무도 모르게 자라났지만 그건 마음에 묻어두도록 하자. 나는 나의 우울에 좀먹혀 겨우 버티고 있었고 그걸 감추려고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외가에 가곤 했지만 언제나 들키고 말았다. 다소 극단적인 성향이 있으시고 지나치게 엄격하셨던 외할아버지는 이미 내가 중학생이던 무렵 너는 마음이 아프다, 병원에라도 보내야 하나 한탄하신 적이 있었다. 우울이 자라나 피부가 바삭바삭 말라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던 오후 외할아버지는 내게 또 말씀하셨다. 너는 마음이 아프다, 병원에 가보거라. 나는 병원에 가지 않았고 세상 모든 것들에게 그랬듯이 외가와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일을 하러 나가는 것 외에는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것이 뼈가 아프다. 자주 얼굴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병원에 가지 않은 것이. 돌아가신 후에도 외할아버지는 남동생의 꿈에 오셔서 말씀하셨단다. 네 누나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네 누나는 아프다. 난 두분의 아픈 손가락이었나 보다.

외할아버지는 지니고 태어나신 생명을 모두 소진하셔서 돌아가셨다. 무슨 병이 오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촛불이 꺼지듯 몸이 옆으로 넘어지고 그대로 잠들어 혼수에 헤매다가 이내 돌아가셨다. 염을 하신 분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표정이셨으니 고통은 없으셨을 겁니다. 입술에 웃음을 머금고 외할아버지는 건너가셨다.

이내 외할머니가 따라가셨다. 춥다고 배고프다고 무섭다고 속삭이다가. 코로나 시절이라 면회도 어려워 마지막 모습을 뵙지도 못했다. 다만 빈소에 차려진 온갖 음식을 보고 나는 오열했다. 외할머니는 음식을 넘기기 어려우셨다. 면역력이 떨어져 아무 음식이나 드시지도 못했고 소화기능이 떨어지고 목이 말라붙어 온갖 재료를 넣은 미음만 겨우 넘기셨다. 그런 외할머니의 빈소에 차려진 과일과 전과 밥과 국. 누군가 거친 손으로 목을 움켜쥐는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돌아가셔서 다시 못본다는 슬픔보다 외할머니 사진 옆에 놓인 윤기흐르는 음식들이 나는 더 힘들었다.

두 분이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는 슬픔이 없다. 보고 싶다거나 그립다거나 하는 것은 그저 나의 몫일 뿐. 한평생 가족들을 먹여살리느라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던 외할아버지는 정년퇴임 후 달콤한 휴식을 겨우 반 년 즐기시고 외할머니 간병에 몸이 묶이셨다.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고 완벽주의자셨던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에 관련된 모든 일을 당신이 하셔야 했다. 불행히도 외할머니의 장애는 누군가의 헌신으로 나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오래 병상에 누워계실 줄 알았다면 그냥 휠체어에 태워서 들이며 강으로 모시고 다닐 것을 그랬다고 엄마는 한숨을 쉬셨다. 초반의 혼몽한 상태가 지났을 때 무른 밥과 부드러운 반찬을 드리기 시작했으면 저작기능과 소화기능을 살릴 수도 있었을텐데. 음식을 못 넘기고 토해내는 외할머니의 고통을 외할아버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병상에 묶인 창백한 삼십 년 대신 잘 드시고 지구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눈에 담는 오 년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를 놓아주시지 않았다.

유년 시절의 내가 기억하는 두분은 금슬이 좋은 부부는 아니었다. 성격이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고 고집도 세셔서 자주 다투셨다. 한 번 다투시면 대화를 하지 않으셔서 진지드세요, 목욕하세요, 같은 말들도 내가 왔다갔다 하며 전달해야 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태어나기 전 젊고 싱그러웠던 두분을 나는 모른다. 태어난 이후로도. 나는 모른다, 두분의 사이에 흐르던 시간의 빛과 결을.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인 시간이 더 많았을 거라고 어림짐작하는 마지막 삼십 년에 대해서도. 내가 무엇을 알겠는가. 다친 마음을 핥느라 자주 찾아가지도 못했으면서.

침대 밑에 앉아있으면 외할머니는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시곤 했다. 할머니, 내가 누구야? 물으면 용이미- 하고 불러주셨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면 외할아버지는 굳이 대문까지 마중나오시곤 했다. 그런 외할아버지를 늘 안아드렸다. 어린 내가 업혔던 외할아버지의 등은 단단했는데 내 품에 안긴 외할아버지는 마른 나무 같았다. 거친 피부와 뼈마디를 가만가만 어루만지며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곤 했다. 나는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무력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울고 있다. 그러니 이 글도 결국은 비겁한 자기치유일 뿐이다. 하지만 오늘같이 추운 날, 두분이 지상에 계시지 않음에 나는 안도한다. 나의 슬픔은 나의 몫일 뿐이다. 나는 두분이 자유롭고 행복하길 바란다. 너머가 있다면 그곳에서 외할아버지는 들과 산을 누비며 즐겁게 방랑하고 계실테고 외할머니는 맛있는 것을 드시고 시장 구경을 하다가 주름치마를 사시겠지. 아마 같이 계시진 않을 것 같다. 그걸 상상하면 결핍보다 안도감이 더 크다. 행복하세요, 할아버지, 할머니. 지상의 고통은 다 지나갔어요. 몸을 가져 얻은 행복도 있지만 몸이 있어 받은 고통도 있으니 이제 몸이 없어 누릴 자유를 만끽하세요. 시간은 물처럼 흘러요. 우리는 곧 만날 수 있어요. 그땐 또 세상이 궁금해 다른 몸을 얻어 지상에 계실 수도 있겠지만. 이 지상의 한 때, 나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로 만나서 정말 행복했어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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