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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임 Jan 17. 2024

이태형, <안녕, 지금 이 순간>

마음은 일순에 꺾이기도 한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서서히 젖어들어 어느 순간 발 하나 뗄 수도 없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 허물어지는 줄도 모르고 무너지는 것. 그 과정이 매일의 생활이라는 점이 가장 무섭다. 단지 매일 살았을 뿐인데 나는 왜 눈도 뜰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한 걸까. 닫힌 창문 너머 왜 계속 빗소리가 들리는 걸까.

소진을 말하는 영상 아래 지쳤다고 쉬지 말라는 댓글이 달린다. 당신이 지쳤다는 것을 사회는 알아주지 않습니다, 지쳤다고 쉬면 그저 게으른 인간일 뿐이에요, 쉬지 말고 계속 일하세요. 눈을 의심했지만 동감을 표하는 대댓글이 가득 달린다. 아프지만 이게 현실인 거죠, 대안이 없다면 쉬지 말아요.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그는 입술을 깨물지 않았을까. 아마 그가 소진된 인간이었을 것이다. 지금 쉴 수 없는 건 그 자신일 게다. 맞다, 어떤 의미로는 맞는 말이다. 쉰다고 회복되지는 않으니까. 매일 숨만 쉬어도 돈이 필요하니까. 생활은 무섭도록 성실하니까. 한순간도 불이 꺼지지 않는 '나'가 있는데 어떻게 쉴 수 있는가. 그런데 그렇다고 마음이 하나도 남지 않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 신발을 신고 현관을 열 수 있을까. 

잠을 자려고 눈을 감을 때 누군가 차가운 손이 심장을 짓누르는 것 같다. 우울이나 절망이 서프라이즈 이벤트처럼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한밤중에 냉장고 문을 열고 불빛에 얼굴을 내어주며 멍하니 앉아있다가 알게 된다. 밥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드는 것도 죽을 만큼 피곤하다는 것을. 정리가 안된 냉장고를 뒤져 먹을 것을 꺼내는 것조차 고통스럽다는 것을.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생활이라는 병은. 

간이 욕조 속에서 침몰하고 있는 남자가 어느 날 욕조를 박차고 희망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는 만화에서나 나올 이야기. 반복재생되는 악몽을 헤매는 남자를 따라다니다가 그만 피곤해졌다. 그가 나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리둥절하며 얼굴을 쓸어내릴 때 나도 얼굴을 만졌다. 매일 거울을 보는데도 난 왜 내 얼굴을 떠올리지 못할까. 수만 겹의 가면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너무 오래 궁금해하여 다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벽으로 이루어진 뒤죽박죽의 시간 속을 표류하는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물론 그 속에서 따뜻한 순간도 있고 아름다운 일들도 있다. 어느 구간은 내내 맑기도 하다. 인생 대운 시기란 누구나 있으니까. 

그러나 작가란 냉정하여 더도 덜도 아닌 인생 지리멸렬을 오려내 우리에게 보여준다. 없는척하려고 했던, 지워버리려고 했던, 있지도 않는 '갓생'을 살려고 했던 우리에게. 마치 벌을 내리듯이. 그러나 이것은 벌이 아니고 그저 기록일 뿐. 내가 들어앉아 있는 친근한 지옥도일 뿐. 

"지금 당신이 멀리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건 당신을 무겁게 하는 사람이에요. 어둡고 진지한 사람을 피하세요.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을 피하고 기분 좋게 하는 사람들만 가까이해요."

해맑게, 그리고 조목조목 강조점을 두며 말하는 단말 속의 당신에게 묻고 싶다. 그럼 내가 피한 그 사람들 곁엔 누가 있나요? 조금의 무거움으로도 쉽게 상처받는 내가, 그래서 적극적으로 가까이 둘 사람과 피할 사람을 가려야 할 내가 아마도 당신을 무겁게 할, 어둡고 진지한 사람일 텐데. 그렇다면 내 곁에도 결국 아무도 없지 않을까요? 귀여운 소악마처럼 뛰어노는 그늘과 그림자 외엔. 

당신은 우리 모두가 적극적 고립 상태가 되길 바라는군요.

인간이 인간에게 무겁지 않을 순 없어요.

지금의 피로도, 고독도, 불편도, 우울도, 좀먹는 불면도, 간이욕조 속의 침몰도 모두

그저 지금 이 순간일 뿐이에요. 그러니 안녕, 

모든 순간에 인사를 고하고 

담담하게 살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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