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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임 Feb 02. 2024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그리고 인간은 끝없이 일렁이는 밤을 보게 되겠지.

페소아는 읽을 수 없는 작가다. 그는 그가 쓴 책 그 자체이다.

그의 문학은 회랑의 가면무도회와 같다. 카에이루, 캄푸스, 베르나르도 소아레스. 그는 불꽃의 사자처럼 당당해지고 동시에 어깨가 굽은 사무원이다. 지명을 수집하는 소년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자라고 감탄했던 그는 불가능이 없는 상상 속에서 세계를 완전히 재창조했다. 신발도 장갑도 다른 산책자들이 다른 우주를 걸었다. 다른 지평을 거닐며 표류한 조약돌을 주웠다. 시와 산문이 차곡차곡 쌓였다. 다른 풍경을 유랑하는 자이나 밀실에서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이가 궁극적으로 쓰고 싶던 텍스트는 무엇일까. 그건 아무리 얼굴을 바꿔도 영혼 밑바닥에서 일렁이는 보편의 감정. 환상 속에 궁핍하게 웅크린 척추뼈.

도아도레스 거리의 보조 회계원인 소아레스는 숫자를 점검하고 숫자를 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일하는 사무원들과 인사를 주고받고, 점심을 먹고, 가끔 강으로 산책을 가고, 매일 머리맡에 올려둔 책을 읽고, 상상을 하고, 아무것도 아님을 쓴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묵묵히 이어간다. 그러나 조용한 사무원의 영혼은 쓰고 또 쓴다. 권태를, 무료를, 변하지 않는 거리와 그 거리에 사는 사람들을, 인사를. 도아도레스 거리를 불꽃처럼 달려가는 그의 상상을 좇다가 이내 관조한다. 소아레스는 현자다. 나는 그가 조용하게 빵을 찢어 입에 넣고 홍차를 마시는 장면을 상상한다. 난방을 거의 하지 않는 작은방에 들어와 외투를 벗고 책상에 앉아 그을음이 가득한 램프 불빛에 의지하여 글을 쓰는 것을 상상한다. 열망을 꺼뜨리고 욕망을 멀리 두고 상하기 쉬운 감정들을 응시하며 그는 가감 없는 문장들을 길어올린다. 소아레스는 현자다. 그는 삶이 통째로 불안 그 자체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권태를 인정한다. 우리는 이미 권태롭기 때문이다. 고요하게 지루하게 이어지는 하루하루의 끝이 아무렇지도 않은 죽음임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음이 곧 자기 자신임을 찬탄도 절망도 없이 안다. 이 길고 아름다운 문장의 묶음을, 하나씩 늘어나는 숫자의 묶음을 감히 ‘서’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것이야말로 불안이다. 그가 기록한, 그가 살아간, 인간의 삶이며 불안.

페소아는 <불안의 서>를 출판하려고 했다고 한다. 아마 그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이 책은 페소아의 의지로 출간되지 못했으리라. 불안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은 소아레스가 책상에서 일어나 펜을 내려놓고 망연하게 종이를 바라보고 책상을 정리하고 불을 끄고 반듯하게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간다. 관절이 풀리고 피가 굳고 몸이 식는 밤이. 나는 가만히 다가가 반듯하게 누운 소아레스를 바라본다. 심장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린 페소아를 바라본다. 몸을 구부려 가만히.

형체도 없는 불안이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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