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엄마와 산책을 하다가 오월의 색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좋아졌다, 정말로. 예전에는 좋아하지 않았다. 초록은 무서웠다. 우글우글하고 생기발랄해서. 만지면 금방 사그러드는 나의 에너지로는 초록을 담아낼 수 없었다. 봄은 잠깐 피었다 지는 꽃, 답답하고 무거운 바다, 먼지 냄새 가득한 하늘로 충분했다. 그것을 뚫고 점점 울창해지고 한껏 짙어지는 초록이라니. 그 옆에 서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오월의 녹빛이 좋아,라는 말에 엄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눈부신지 알게 되니까. 머리가 희끗한, 한 해 한 해 몸피가 줄어드는, 이가 흔들리는, 나의 엄마가 내 손을 꼭 쥐었다.
문장 가득 섬세하게 배치된 단어들이 이루는 조화가 꼭 오월 같고 오월의 초록과 같아서 그가 오월의 서른한 날을 기록해 다행이다 싶었다. 어찌나 정성스러운지 하루만 읽어도 배가 불러서 오래 두고 읽었다. 그 사이 나무는 점점 짙어지고 해도 점점 길어졌다.
세계는 기름칠한 유리벽과 같아서 손톱을 세워도 기어올라갈 수 없었다. 세계와 나 사이엔 언제나 막이 있었다. 그래도 투명하여 바깥을 엿볼 수 있던 막이 탁해지고 두꺼워져 좀처럼 살아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을 때 이 글들을 읽었다. 비가 자주 내렸다. 창문을 열면 나무들이 몸피를 불리며 뿜어내는 향이 몰려왔다. 도무지 실감 나지 않는 생기가.
그라고 우울이나 절망에서 자유로울까. 재기발랄하게 말하고 영민하게 글을 쓴다고 이 세계가 실감 나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도 귀를 열고 눈을 열고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수첩을 불려나가는 그는 오월의 초록을 닮았다. 막 겨울을 벗고 꿈틀꿈틀 살아나는 마음의 움직임이 문장에 고스란히 배어났다.
아, 무어라도 써야지. 중얼거렸다. 살아있고 싶다, 고도 생각했다. 책을 덮고 나니 배가 고팠다. 수첩과 연필을 꺼내놓고 그 옆에 밥그릇을 놓았다. 찬물에 밥 한 술 말아 한 입 가득. 꼭꼭 씹으면 단맛이 난다. 촉촉하다가 칙칙하고, 촘촘하다가도 침침해지는 여정은 이렇게 밥 한 술 한 술의 걸음걸음인지도.
그저 이런 게 살아있다는 것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