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원래'의 힘은 무엇인가. 어떤 문제의 원인을 탐색하려 할 때 '원래'라는 말은 모든 성찰의 타래들을 빨아들인다. 원래라는 성벽 안에서 답습한 나쁜 관성이 있다면, 그게 별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면, 굳이 변화를 위해 애써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내가 원래 그래" "원래 그렇구나" 하면서. 그렇게 담담하게 원래라는 블랙홀로 우리는 빨려들어간다. 그러니 '원래'에는 나쁜 힘이 있다.
<여성 - 윤채의 이야기> 중
인천에 살다가 학창 시절을 창원에서 보내고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해 그곳에서 직장을 잡고 살아온 지 오래. 살아온 시간으로 고향을 따지자면 내 고향은 서울이라고 불러야겠지만, 누군가 고향을 물으면 늘 창원이라고 대답한다. 그곳에서 가장 예민한 시간들을 보냈고 엄마가 아직 그곳에 살고 계시기에. 고향이라는 것이 뿌리가 묻힌 곳을 의미한다면 육체의 뿌리인 모친이 사는 곳이고, 정신의 뿌리들이 자라난 곳이기에.
그래서 가장 오래 산 이곳에서 언제나 나는 이방인 같은 마음이다. 어디를 가도 낯설고 어디에서도 늘 마음이 미끄러진다. 그렇다고 고향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이미 너무 오래 떠나왔기에 말투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낯설고 거북하다. 인간이 땅을 떠나 무형의 것들에게서 생활을 이루면서부터 겪을 수밖에 없는 일종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나 아이들은 부모를 떠나 도시로 향하는 경향이 있고 그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와 같은 경험을 다들 할 것이다. 어디서도 정착할 수 없는 디아스포라의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무언가 구분짓는 것을 싫어한다. 보수/진보, 전라도/경상도, 남자/여자, MZ/비MZ, 수도권/비수도권, 학연, 지연, 온갖 연, 연, 연. 패를 나누고 무리를 이루는 이들이 불편하다. 어디서든 이방인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무리를 짓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더 외롭다. 그렇다고 어느 패에 쉽게 들어가기에는 타고난 반골기질이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어쩌면 저렇게 쉽게 하나의 목소리를 낼까. 바라보고 있으면 질린다. 내가 사는 나라가 패를 이루는 일의 부작용을 적잖게 앓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서 이 책의 부제부터 마음에 걸렸다. '경상도의 딸들은 왜 진보가 되었나' 라니. 싫어하는 단어가 벌써 두 개나 있잖아. 마뜩잖은 마음으로 표지를 펼쳤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단숨에 읽었다.
이 책은 매끄럽지 않다. 절차탁마하며 단련한 언어로 쓰인 책이 아니다. 둥글고 연한 얼굴이, 희고 가지런한 손가락이, 나를 마주 보고 조용하게 때론 왁자하게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차가 미지근해지면 뜨거운 물을 다시 부어 우리며, 찻잎에서 더 이상 아무 맛도 나지 않을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속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그녀들의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구분 짓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니다. 내게도 세계를 바라보는 나만의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을 세우기까지 나도 그녀들처럼 오래 아팠다. 아팠던 이유가 바로 가까운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강요하던 구분짓기였기에 나는 그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우리는 불안하고 무서운 시간을 보냈고 보내고 있다. 어디로 향할지, 이 불안이 과연 끝날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일은 좀 더 나은 시간을 살고 싶은, 당연한 마음으로 세상에 띄워보낸 이 글을 읽는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고, 무엇도 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막막하고 캄캄한 세계에 외친 목소리는 단단했다. 마음을 두드렸다.
불안하게 출렁이는 밤을 바라보며 숨을 내쉰다. 우리는 모두 숨을 쉬고 있다. 이곳저곳에서. 각자의 마음으로 열심히. 마음을 바로 세우는 일, 생각을 멈추지 않는 일, 그러면서 우리는 이 지구 위에 흩어져 빛난다. 우리가 내쉰 숨이 매듭을 이루고 아름다운 덩굴이 되어 사람의 세상을 이룬다. 아무 생각 없는 패거리가 아니라 느슨하지만 올바른 연대로. 우리의 표류가 언젠가 아름다운 기슭에 닿기를. 그날을 꿈꾸며 또 하루를 바르게 마주한다. 나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