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열광을 되찾기 위해.
이 책은 서양의 고전을 훑고 있지만 그 중심에 놓여 있는 텍스트는 허먼 멜빌의 모비딕이다. 저자 자신이 '사악한 책'이라고 표현한 모비딕은 근대의 인간에 대한 커다란 의문을 던진다. 에이허브 선장을 집어삼키고도 에이허브 선장을 보지 않는 저 거대한 고래는 세계다. 한눈에 인식할 수 없기에 얼굴이 없다고도 말할 수 있는 고래와 맞닥뜨린 인간은 사정없이 난파되지만 이슈마엘은 살아남는다. 이교도인 퀴케그의 관을 부여잡고 이슈마엘은 바다 속에서 구원받는다. 마치 바다의 모든 위험이 그를 알아서 비켜가는 듯한, 삶에서 드물게 찾아오는 기적이 그의 생명을 구했다. 고래는, 세계는, 우주는 인간에게 무관심한가. 단 하나의 답을 찾아 다른 어떤 것도 바라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생명을 불태운 에이허브에게 죽음을 선언하면서도 끝끝내 한 인간을 으스러뜨렸다는 것을 눈치채지조차 못하는 냉혹한 고래가 사라진 바다는 모든 정조와 현상에 열린 마음으로 임했던, 무조건적인 공동의 환희에 열광하기도 하고 신념에 따라 이교도인의 제례에도 기꺼이 머리를 숙였던 이슈마엘을 감싸안아 인간들 속으로 돌려보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열광하는 삶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불안을 잊기 위해 열광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말했던 유명한 인식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위에 사고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현대인은 이해의 범위 밖에 있는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환희를 보면 의식이 움츠러들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보고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는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의지가 개입하지 않는 반사적인 행동 - 그 행동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다면 더더욱 - 이 어렵다. 하루에 한 시간 글을 쓰고 나머지 일곱 시간은 글을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 머리를 움켜쥐고 고민하다가 결국 그 고민덩어리 머리를 천정에 매달아 생을 마감했던 월러스가 지금 여기 우리의 모습에 훨씬 가깝다.
우리는 허무하고 무기력하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생각에 잠기고, 책을 펼치고, 강연을 듣고, 급기야 스스로 글을 써보기까지 하는 이 모든 노력이 우리의 허무와 무기력을 증명한다. 잠시라도 존재증명을 하지 않으면 뿌리부터 투명하게 변해 사라지고야 말 것 같은 현대인의 불안이 우리를 탈진하게 만든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흰색의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인간. 그는 언제나 옳아야 하고 언제나 신념에 의해 의미있는 행동을 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겨우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다. 이렇게 쓰기만 해도 피로가 몰려온다.
하지만 이 고민을 멈출 수 없다. 무조건적인 열광에 몸을 던진 나머지 전 세계가 피를 흘렸던 지난 세계대전의 교훈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탐닉과 중독으로 자신 뿐 아니라 주변을 망치는 일들은 지금도 허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아니면 말고, 라고 간단하게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이미 의지를 손에 얻었기 때문에, 내면의 자아를 깨워버렸기 때문에 먼 옛날의 신들을 호출해 의지의 움직임을 의탁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열광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갖는 것이다. 무엇에 열광하고 무엇을 비판할 것인가. 전체의 환희에 몸을 던지는 순간과 단호히 몸을 돌려 혼란 속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을 현명하게 구별해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의지가 작동할 '적절한 순간'이다. 스스로를 점검하고 옳고 그름의 혼란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에너지가 고갈되어 영혼의 번아웃 상태로 들어가 버리는 순간이 아니라. 어떤 의지도 없는 순백의 세계를 깨뜨리는 순간 세상은 장밋빛, 하늘의 색, 나무의 짙은 색으로 빛난다. 그 색으로 넘치는 신들의 만신전에서 우리는 기쁨을 아는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
"모든 것들이 빛나는 건 아니라네. 하지만 더없이 빛나는 것들은 존재하지."
그렇기에, 우리의 인생은 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