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조차 받지 못했던 그가 판자의 틈새로 단란한 가족의 목소리를 엿들을 때 눈물을 흘렸다. 시체를 기워 만들었기에 기형적으로 긴 팔다리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을 때 그가 느꼈을 공포가 전해져 소름이 돋았다. 아무 기억이 없어 텅 빈, 하지만 동시에 여러 기억이 들끓어 스스로를 정의 내리지 못했던 어린아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버려지는 존재라니. 나는 왜 계속 눈물을 흘렸나. 누가 길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뼈를 훑어내는 것처럼 아팠나.
우리는 모두 텅 빈 존재로 태어난다. 어미에게서 갓 밀려나온 생명체는 눈을 뜨지 못하고 피 냄새를 짙게 풍긴다. 채 형성되지 못한 장기들이 자라고 빛과 소음에 눈과 귀가 익숙해져도 세상은 두렵다. 모르기 때문이다. 아기는 필사적으로 손발을 휘저어 낯익은 냄새를 풍기는 부드럽고 따뜻한 몸을 찾는다. 입에 젖을 흘려 넣어주고 조심스럽게 감싸안아주고 조그맣게 반복해서 이름을 불러주는. 인간의 아기가 처음 하는 말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정의 내리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으로 기억하게 될지도. 아니 그래야만 하지만.
빅터라는 이름이 세상의 모든 것이었던 그는 불길 속에서 울부짖는다. 빅터 - 빅터 - 스스로가 무엇인지도 몰라서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대상을 계속 불렀다. 말을 배우기 전 그의 호명은 모두 사랑이었다. 빅터, 엘리자베스.
어째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마지막까지 그에게 이름을 주지 않았을까. 그는 아비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이름에 짓눌려 평생을 살았다. 오로지 아비에 대한 증오로 그를 창조했다. 그래서 이름을 줄 수 없었던 걸까. 명명한다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름을 붙이며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리고 기원하는 것조차 그에게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그는 생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빚어낸 것이라고 믿었기에, 마지막까지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밖에는 못한 것일까. 아니, 빅터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이름은 살아가는 그가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대물림되는 꿈이나 욕망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발굴해야 하는 것이라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얼음 위에서 그는 죽지도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 태양을 향해 손을 뻗지만 그의 다음날 또 다음날은 얼마나 고독하고 고단할까. 그래도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제 다양한 감정을 덧입을 것이다. 어쩌면 친구를 만나고 어쩌면 사랑도 하며 어쩌면 수십수백 개의 이름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그는 이제 태어난다. 태어남이 곧 축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바위처럼 나를 짓눌렀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무거운 육체를 짊어지고 쉬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고독하고 고요한 것. 어스름의 시간 끝에 답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이름을 받고 이름을 주고 이름을 버리는 일을 반복하는 것일지도. 하나의 이름에 묶여 삶의 결정권을 잃어버리는 일도 간혹 있겠지. 그런 삶도 있고 아니기도 하다. 아비로부터 이름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의 머리 위에 빛나는 운명의 별은 없다. 사방이 그의 길이다. 하얗고 거친 길. 피 흘리는 발로 어디든 나아가라. 그는 크리처. 창조물이며. 낯선 것. 그리하여 한없이 불완전하며. 한없이 완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