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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

by 별이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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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주 오래 전에 잠시 내 마음을 스쳐갔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문학은 복화술과 같은 것이다, 너무 가늘고 약해서 사람의 귀에 닿지 않는 소리를 오래 내는 것이다. 눈이 내리는 날, 가슴을 앓는 사람이 기어이 방문을 열고 내어놓는 소리처럼 드문드문한 것이다.


요즘은 시를 여러 편 연달아 읽기가 힘들다. 시에 스민 목소리가 커졌다. 시는 우렁우렁 웅변한다. 시가 이렇게 유용한 것이었나, 시가 이렇게 거센 것이었나, 어리둥절하면서 책을 닫고 멀리 창밖을 본다. 꽃이 지고 벌써 잎이 돋는다. 오래 걸으면 등에 살짝 땀이 돋는 계절이다.


하지만 지난 겨울에 쌓아올린 눈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네 사람이 꼭 한 사람인 것처럼 겹쳐서 깊어졌던 발자국은.


'윤리적인 거짓'으로 타인의 고통을 알기 쉽게 명명하고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언제쯤 괜찮아질 거냐고 충혈된 눈으로 소리지르는, 세상은 정말 다정하고 선한 폭력이다. 그 폭력이 너무 따뜻해서 눈사람은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다. 눈사람 위로 차곡차곡 겹쳐졌던 어떤 얼굴들도.


영문도 모르고 절단된 발가락을 유리병 속에 담아들고 여느 소설속 누구라면 발가락이 과연 나와 가야 하느냐, 여기에 버려져야 하느냐, 신체에서 적출된 이 흐물흐물한 살덩이는 의미가 있는 것이냐, 의미가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를 사유하기 전에 미칠 듯이 올라가는 택시 미터기의 요금이 우리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보험처리가 되지 않으면 몇백 만원이 되는 진료비가 기어이 우리에게 반성문을 쓰고 다음 예약을 잡게 만든다. 사회가 규정지어둔 '마땅한 고통의 자리'가 있어 마치 좌석표를 발권한 것처럼 거기 얌전히 가서 앉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고통도 이 세계가 규정지어둔 풍경이다. 상냥한 위로를 받으며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회복도 세계가 정해놓은 정답이다. 그럴듯한 선의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닌 폭력이다. 그걸 세계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눈덮인 숲을 걸어가 누가 만들다 버린 눈사람을 발견한다면 쪼그려 앉아 오래 눈덩이를 뭉치고 매만져 조그만 사람을 만든다. 봄이 되면 흔적도 없이 녹아버릴, 무너지기 쉬운 눈사람을. 눈사람이 녹은 자리엔 무엇이 피어날까. 고슬고슬한 개쑥갓이, 일년 내내 지천으로 돋아나는 개쑥갓이 뭉글뭉글 피어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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