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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프니 머킨 <나의 우울증을 떠나보내며>

by 별이언니

원제는 이렇다. This Close To Happy.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그녀가 제목에 박아넣은 강박적인 희망을 다시 읽는다. 닫고 싶다는 열망과 끝내고 싶다는 소망, 그리고 행복. 과연 무엇이 행복인 걸까. 살아있다는 것, 아니면 삶을 끝내는 것?

책을 번역하고 출판하면서 제목을 새로 붙일 때 번역자는 소망했을 것이다. 아마도 주변인 누구라도 상식적이고 온정이 넘치는 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나의 우울증을 떠나보내며 - 라고.

하지만 나는 무례하게도 그녀의 어둠에 은밀히 깃들어 중의적인 소망, 오후 햇살이 기울 때 바닥에 떨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갈비뼈 언저리 섬뜩하게 차가운 속삭임을 듣는다. 우울은 떠나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울은 차라리 병든 장기처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 안의 우울이, 숨겨진 장기가 뿜어내는 푸른 피가 속삭인다. 우울의 삶의 태도야, 결코 이해받을 수 없는.

선천적으로 예민한 아이였던 그녀가 처음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을 때, 숨쉬는 모든 순간에 자살을 생각하며 침대에서 꼼짝도 못할 때, 그녀를 집어삼킨 것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라고 나는 또 멋대로 생각한다. 주머니에 돌을 주워넣으며 물속으로 걸어들어간 버지니아 울프나 옆방에 아이들을 두고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은 실비아 플라스, 보드카 한 잔을 마시고 어머니가 입던 모피코트를 입은 채 시동을 켠 차 안에서 가스 중독으로 생을 마감한 앤 섹스턴이 자주 언급된다. 그들은 결국 자살에 성공했다. 그러나 자살한다는 생각, 자살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 자살이 마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 대프니 머킨은 자살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살을 하지 않기 위해 약을 먹었고 상담을 받았고 병원에 입원을 했고 거리에서 울음을 터뜨렸고 가학적인 유모의 망령에 주먹질을 했고 어머니를 사랑했다.

고통을 대하는 여러 방법이 있다. 그 중 가장 참혹한 것은 스스로의 고통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다. 고통이 너무 심할 때, 뜨거운 불을 대하는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 외면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오래 시간을 보내면 영혼의 감각이 사라진다. 영혼은 생각보다 여린 것이어서 다루는 방법대로 쉽게 병들고 죽는다. 통각이 사라진 영혼을 가진 사람을 마주 대할 때, 그 끔찍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가끔 일어나 그 무감한 얼굴을 힘껏 후려치고 느껴, 느끼라고, 도망치지 마! 라고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그것조차 폭력이다. 얼마나 심한 고통이었기에 자신의 온영혼을 짓누르면서 끝끝내 도망쳐야만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 고통이 내게 스며드는 것 같아 숨을 쉴 수가 없다. 이것이 과연 공감일까, 아니면 어둡고 슬픈 것들에 저절로 열리는 나의 병일까.

그녀는 도망칠 수 있었지만 끝내 도망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울고 적극적으로 소리지르고 적극적으로 별장을 사들이고 적극적으로 자살을 꿈꾼다. 그것이 그녀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고, 그것이 그녀가 우울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던 힘이었다. 결국 등뼈도 없을만큼 나약하다고 표현한 그녀가 그렇게나 강인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마침내 죽었을 때 우리 몸에서 빠져나온 우울은 그 푸른 멜랑콜리아의 낯빛으로 우리에게 무어라 속삭일까. 나는 데드마스크처럼 무표정하게 내 안에 떠올라 있는 우울을 더듬어본다. 그 눈이 열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날은 아마도 내 눈이 감겨 더이상 아무 것도 보지 못할 날이리라. 우울과 내가 마주 보고 서로를 알아볼 일은 없으리라. 우울 역시 적극적으로 맹렬하게 자신만의 무엇을 견디고 있을테니. 오장과 육부를 지나 몸 어딘가 반드시 숨어 있을 우울의 피주머니를 눈을 감고 찾아본다.

이 책은 몹시 느리게 읽었고 고통 때문에 숨을 쉴 수 없던 적도 있었다. 이렇게 솔직한 고백이라니, 놀랍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글이 있어, 글을 쓸 수 있다는 힘이 있어 그것은 구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프니머킨

#나의우울증을떠나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