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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by 별이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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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만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견딜만한 감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대체 우리는 어떻게 이 찰나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회사 건물을 나와 올려다보는 하늘이 머리 위로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믿어야지만, 딱 그 정도의 무게여야지만 걸을 수 있다.



우울을 우울이라고 말할 수 있던 시절은 차라리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 블루' 라고 부르는 가볍고 쌉싸름한


감정은 적어도 절대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생활인의 결의 같은 거라서.



생활이란 말은 반드시 아름답거나 건강하지는 않다. 되려 생활이란 말에는 쿰쿰한 냄새가 나고 간밤의 지겨움이 구겨져 있다. 우리는 모두가 개별자이며 아름답다던가, 어제와 다른 오늘을 힘차게 살아보자는 말들은 공허하다. 구호는 생활앞에 공허하다. 구호가 생활을 빛나게 해주었던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은 행복했겠지.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빈곤해지는 세상에서, 다소 낮은 효율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어금니 꽉 물지 않고 주먹을 움켜쥐지 않고 냉장고에 머리를 넣어보는 것만으로도 오늘 무사히 잠들 수 있어야 한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다가 무릎을 깨면 병원비도 들거니와 애초에 술값도 아까우니까. 이리저리 나갈 돈을 제하고 나면 하루에 쓸 돈이 몇만 원 남짓- 그런 계산을 출근 첫날부터 하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문 앞에 서서 작아지는 마음을 부여잡아야 하니까. 오만원에는 오만원을, 만이천 원에는 만이천 원을 돌려받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잘 살겠다고, 잘 살라고 무심코 중얼거리게 되니까.



차라리 인생을 파산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용기라도 있다면, 우울을 우울이라는 무서운 단어로 부르면서 가슴에 핏발을 세울 수 있는 오기라도 있다면, 되려 아직은 살만한 세상일지도 모른다. 무기력하게, 지루하게, 하지만 어떻게든 내일을 희미하게 잡으면서 오늘도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어느새 물을 먹은 듯 무겁게 갈비뼈를 짓누르는 감정을 쥐어짜 견딜 수 있을 만큼 가볍게, 자기기만을 하며-. 내일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하늘도 블루- 루보프 스미로브나 리사이틀 티켓을 구매하는 순간을 위해 오늘도 블루- 무엇과 타협하는지도 모르면서 레고를 선물하고 포인트로 지급된 월급을 중고거래 사이트를 통해 현금으로 되돌리며 - 일은, 어느덧 내 하루의 모든 것이 되고, 내 인생의 태반을 차지해버렸지만, 무엇도 보람차지 않은 일은 - 당연히 슬프고 한순간 기쁘기도 하다. 일 자체가 슬프거나 기쁜 것이 아니다. 무색무취의 무기력, 정의라던가 꿈이라던가는 복지나 4대 보험의 푹신푹신함에 떠밀려 사라지는 야근 마라톤의 만성피로를 기만하기 위해 내가 바치는 노력이 기쁘고 슬프다.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고지고 어떻게든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만큼의 감정들. 그 감정을 고요히 기울여보는 밤이 온다. 명도와 채도가 다른, 밀도와 점도가 신기한



어느 엇비슷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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