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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모기 Mar 11. 2024

부드럽다. 내가 꿈꾸는 좋은 세상.

젊은 공무원의 명복을 빕니다.

뉴스 화면 가득 엎드려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잡혔다. 아들을 외쳐 부르고 있었다. 아들을 찾는 어머니의 흐느낌에 아들의 엄마인 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의 동료가 소리치며 울었다. 악성민원으로 같은 고통을 겪고 있어 조문하러 먼 곳에서 달려왔다는 젊은 공무원이 울먹였다. 며칠 전 저녁 뉴스 시간에 본 장면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을 것이다. 그 어렵다는 공무원시험에 합격했고 2년이 안 되는 재직기간 동안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 왔을 터이다. 어느 날 공사로 도로가 몹시 막히는 데에 화가 난 누군가가 업무 담당자인 그의 이름과 신상을 세상에 알린다. 공격한다. 비난한다. 많은 이들이 가세하여 그에게 뾰족한 칼을 겨눈다. 그는 당혹스럽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삶을 거두었고, 그의 엄마가 '내 아들 어떡해'라며 털썩 주저앉아 통곡하고 있는 것이다.


뉴스를 본 나는 너무 화가 나고 속상했다. 왜 그랬을까. 그렇게까지 특정인에게 공격의 화살을 쏟아부어야만 하는 일이었나. 개인신상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알리는 게 말이 되나.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도대체 왜 그리 공격적인가. 인간의 본성인가.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까.

밀려드는 질문 속에 파묻힐 지경이 되어 급히 호주에 사는 큰딸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뉴스 내용을 설명해 주고 호주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를 질문하자마자 딸은 일단 'no'를 말한다. 신상 털기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공사로 인해 길이 무지막지하게 막힌다 하더라고 호주인들은 그렇게 특정인에게 화를 낼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막히는구나 하며 기다렸을 것 같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내게 말하다가 옆에 있는 호주인 남자친구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긴 대화를 한다. 딸과 남자친구가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는데, 남자 친구가 말하는 단어 속에 happier라는 말이 들린다. 한국인들에 비해 호주인들이 전반적으로 행복한 것 같다는 의견이다. 우리의 대화는 한국의 수직적인 사회 문화와 인간관계, 완벽함을 추구하는, 빠름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기질 등 수많은 가지를 뻗쳐나갔다. 왜 호주인들은 더 많이 웃으며 더 많이 행복할까 하는 나의 질문 앞에서 한국의 경쟁사회와 빈부격차 문제, 기본적인 소득 보장의 문제, 정답 찾기라는 한국의 교육 문제까지 거론되었다. 그렇게 나와 딸과 호주인과의 통화는 1시간 가까이 길게 이어졌다.


전화를 끊는데 오연호 님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책 제목이 떠올랐다. 행복지수 1위인 덴마크 사회를 들여다보며 대한민국의 행복 가능성을 가늠해 보는 내용의 이 책을 수업시간에 고1 전체 아이들과 함께 읽고 토론했던 몇 년 전 수업 풍경이 떠올랐다. 작년 김애란 작가의 소설들을 아이들과 함께 읽으며 혐오를 고민하기도 했었다. 그런 수업 정도만이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모래알만 한 역할일 뿐이라는 게 좀 힘이 빠진다.

과연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지금보다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 기반과 제도적인 문제가 당연히 중요할 것이다. 사회 전반적인 사람들의 의식 수준도 조금 더 건강해지면 좋겠다. 사람이 사람에게 덜 화내고 더 다정해지면 좋겠다. 조금 더 상대방의 처지를 고려하고 배려하면 좋겠다. 혐오의 언어를 줄이고 타인에게 뾰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드러운 사람.

부드러운 말투.

부드러운 시선.

부드러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호주나 덴마크나 저 멀리 있는 잘 사는 나라들 말고 내가 사는 내 나라도 부드럽고 여유가 있어서 그래서 더 많이 웃으며 살면 좋겠다.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치신 젊은 공무원분과 그 어머니(아, 너무 아픕니다ㅠㅠ)와 가족분들께 조의를 표하며 깊이 허리 숙입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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