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심부름이 무서웠던 시절
[안 보일 수밖에]
간혹 일은 곧 잘하는데 늘 본인이 익숙한 방식으로만 문제에 접근하고 풀어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함께 일하기에 편하긴 하지만 많은 가능성을 놓치게 되는 게 무척 아쉽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여기선 그게 안 보여요’라고 말하는 것은 관점의 모순이니까요.
위치를 옮긴다는 건 바꿔 말해 다른 사람이 되어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 사람이 서 있는 위치에서 이걸 본다면 어떨까.’ 그렇게 관점을 이동하며 문제에 접근하면 평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포인트들이 레이더에 포착되거든요.
(기획자의 독서 | 김도영 저)
어릴 때 어머니는 거의 완벽주의자였다. 모든 걸 완벽하게 구상하고 실천하고 정리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족이 모두 자신의 기준에 맞춰 따라오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기준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개라는 방식으로 옷가지들을 가지런하게 개기 힘들었고, 어머니가 생각한 바로 그 위치에 무언가를 제대로 갖다 놓을 수도 찾아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어머니가 방에 들어가서 무얼 찾아오라고 시키면 나는 겁부터 냈다. 어머니는 이렇고 이렇게 된 곳에 그것이 있다. 눈 딱 감고도 찾아올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우선 찾아오라는 물체에 대한 명확한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완벽하게 그 물체가 있었지만 전해듣는 나로서는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가령 5단 옷장이 있다고 하면, 맨 아랫칸에 노란 색으로 된 어떠한 옷이 있으니 그걸 가져오라고 시켰다고 해보자.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생각하는 어떤 이미지를 떠올린다. 내가 생각하는 옷의 개념과 내가 생각하는 노란 색의 기준이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머니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찾지 못했고, 어머니는 화를 내며, 그거 하나를 못 찾느냐며 짜증을 냈다.
한두 번 찾아내는 것이 실패할수록, 한두 번 어머니가 원하는 방식대로 계속 해내기가 힘들어질수록 나는 그것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늘 "그것이 안 보여요!"라며 볼멘 소리로 대답하곤 했다.
이 글귀를 읽으며 그때를 떠올려보니, 나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그것을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어린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의 입장과 생각을 헤아리며 심부름을 할 만큼 깊이 성숙하진 못한 아이였다.
보이지 않으면, 그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이성에 기초한 판단이다.
이성은 감각에 기초한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이성이 가짜일 수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내가 경험해봤지만, 그래서 이건 이 다음에 이렇게 될 거야,라고 장담할 수도 있지만,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구석이 더 많다는 걸 알아야 한다.
감각은 직관적이고 나를 현실에서 깨우쳐준다.
하지만 뇌과학을 공부해보면, 뇌가 얼마나 얄팍하게 정보를 받아들이는지 알고는 깜짝 놀랄 것이다.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오기 때문에 뇌는 익숙한 것은 걸러버린다.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을 땐 잠시 멈추고 다른 곳으로 가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꼭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더라도 좋다.
내 입장에서, 내 경험에서, 내 판단에서, 내 기준에서 한 발짝만 옆으로 비켜나면,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엄마도, 자녀 입장에서, 자녀의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 생각하고 결과를 판단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하긴 그때는 엄마도 처음이라 자녀의 마음까지 헤아리긴 어려웠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