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부신 날 Aug 10. 2023

환대에 관하여

입원 후 첫 출근의 단상

[환대에 관하여 - 입원 후 첫 출근]



목디스크 수술을 지난 주 화요일에 하고 화수목금 연차를 냈었다. 처음에는 이번 주 월요일부터는 출근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신경을 누르고 있는 흘러나온 디스크만 제거하는 내시경 수술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사 선생님도 수요일 수술하고 목요일 정도에는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 얘기했었다. 하지만 왼쪽으로도 팔 저림과 통증이 심해진 상황이어서 의료진 회의 결과 손상된 디스크를 제거하고 티타늄으로 된 인공디스크를 삽입하는 수술이 좋겠다고 했다. 인공디스크를 삽입하기 위해서는 목 앞부분을 절개해야 했다. 이제 평생 목에 기다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평생 몸에 금속재료를 넣어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조금씩 인조인간이 되어가는 걸까. 그렇게 수술이 커지고 비용도 커지고 입원일자도 하루 더 늘어났다.


입원 중에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무려 꽃바구니를 보내주었다.) 월화수 정도는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짧은 거리지만 자동차로 운전해서 지하철역 환승주차장까지 가야 하고, 복잡한 1호선 지하철에서 1시간 이상을 가다보면 자칫 목에 무리한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금속 성질의 인공디스크를 삽입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기존 척추뼈와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했고, 이 시간 동안에는 안정적인 상황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월요일 화요일을 집에서 일하고 보니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장 금요일에 중요한 회의가 잡혀 있고, 그 회의 때문에 모든 팀원이 주말 없이 일을 해왔다. 교통 정리를 해야 했고, 상황 점검도 필요했다. 사내 네트웍을 통해 또는 전화를 통해 얘기를 해도 되지만 아무래도 직접 가서 보다 정확한 분위기와 상황 판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목요일 오전에는 수술을 위해 절개한 부분의 실밥을 빼내기 위한 의사선생님 진료가 예약되어 있어 목요일 오전도 반차를 신청한 상태여서 회사 사무실을 비우는 날짜가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요일부터 사무실에 나가지 않았는데, 일주일하고도 이틀이나 지난 다음 주 목요일 오후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한국사회의 조직 특성상 조금 지나친 면이 있었다. 수술을 했다는 큰 요인이 있지만 퇴원을 했음에도 여전히 재택근무를 한다며 나오지 않는 것은 회사에 나쁜 선례를 미칠 것이라는 스스로의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해석에 미안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팔다리 다 멀쩡한 데 목에 보조기 하나 채웠다고 회사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평가를 해봐도 지나친 자기보호가 있지 않나 하는 반성까지 해보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하는 자기검열에 이미 익숙하다. 그래서 수요일까지 재택근무한다고 신청을 했지만 오후에 얼굴을 살짝 내비치면 그 열심도 알아줄 것이고, 목요일 오전에 다시 반차 신청을 하고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조금 덜 미안할 것 같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얼마나 이 생각을 많이 했던가. 그런 생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자신이 우울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누군가에게 비쳐지고 평가받는 것에 익숙해진 나 자신을 어쩔 수는 없었다.


그렇게 수요일 오후에 집을 나섰다. 화요일에 입원해서 병원에 계속 누워 있었고, 화요일까지 계속 집에만 있었으니 다리 근육은 갑자기 웬 보행이냐며 자신의 상황을 어색해했다. 근 일주일 이상을 실내에서만 왔다갔다 한 상황이라 다리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잊어버린 듯 했다.


그렇게 허물어진 다리를 다시 세우고 자동차 가속기와 감속기를 번갈아가며 눌러 본격적으로 걷기 위한 완충 행동을 했다. 35도가 넘은 뙤약볕에 목을 완전히 감싸는 보조기까지 차고 있으려니 땀이 샘물처럼 쏟아져나왔다. 차에서 내린 나는 흔들거리는 다리를 살살 달래가며 뜨겁게 달구어진 아스팔트 도로로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마치 죄를 지어 감옥에 갇혀 있다가 정해진 날이 되어 밖으로 나온 자유인 같았다. 뜨거운 햇살도  날 반겨주는 것 같았고,  변하지 않은 풍경들도 나를 기억하며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햇살에 실눈을 뜨고는 날 반기는 살아있는 것들에게 까닥까닥 인사를 했다. 늠름하게 서 있는 느릅나무와 반짝이며 바람에 손을 흔드는 나뭇잎들이며 전깃줄에 앉았다 잽싸게 땅으로 내려와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먹이를 주워먹는 참새들까지 다 반가웠다. 녀석들은 내가 오랜만에 외출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서둘러 인사하고는 자신들의 둥지로 종종종 되돌아갔다.


지하철도 마찬가지였다. 열차는 무거운 식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는 지칠 줄 모르는 힘으로 선로 위를 달렸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그들은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정해진 시간을 지키며 손님들을 태우고 내려 드렸다. 그들은 그저 달리다 멈추기만 할 뿐이었지만 제 시간에 가서 지하철을 탄다는 것만큼 정확한 환대는 없다.


환한 대낮에 타는 지하철은 또 그대로의 맛이 있었다. 마치 지하철 객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을 열어 주었다. 오후 시간이라 한산한 객차 안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수줍게 바깥 풍경을 보여주었다. 꼭 나만 봐야 한다며 홍조를 띠고 살짝 눈웃음까지 쳤다. 다행히 바깥 풍경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자기의 삶을 반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풍경은 아예 관심 밖이었다. 그래도 이 시대 풍경은 버림받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환한 대낮 지하철 창으로 다가왔다 사라지는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다가왔다 사라지는 것은 참새나 느룹나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풍경들은 이내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나에게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정성을 다했다. 마치 온 마음을 쏟아 도시락을 싸주는 손길 같았다. 나를 어루만지는 풍경의 손길이 느껴졌다.



이제 사무실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4층에서 내리자 고요가 찾아왔다.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얼굴 인식으로 문을 통과하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큰 관심이 없을 수 있다. 나만 약간의 어색함을 극복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부서를 지나치며 작은 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나는 목에 커다란 하늘색 보조기를 두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쉽게 관찰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인사를 받고 눈을 들어 깜짝 놀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 타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웠는데도 나를 보며 일어나 맞이해주는 사람이 없다니. 간혹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며 나를 보는 사람이 있었지만,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와 수술은 잘 되었냐고. 이제는 괜찮은 거냐고, 진심어린 표정으로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부서.


나를 본 모든 팀원이 일어섰다. 나는 팀원들에게 둘러싸여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그래 팀원밖에 없구나. 나는 그제야 어색함을 떨쳐내고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수술 경과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진행되는 업무를 챙겼다.



팀원들은, 재택인데 왜 나왔냐며, 목에 보조기를 차고 여기서 어떻게 일한다고 일을 가져왔나며 성화를 했다. 나는 오후 근무로 여섯 시까지는 일하려고 생각을 하고 왔는데, 팀원들은 퇴근 시간 지하철이 혼잡해지기 전에 퇴근하라며 나를 보챘다. 진정 나를 생각하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도 목보조기를 해봐서 얼마나 힘들고 불편한지 안다면서, 여름에 땀이 많이 찰 텐데,라며 걱정을 해주었다.



사실 이번 주는 가장 힘든 주였다. 다들 토요일 일요일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내가 맡은 일의 시급성과 엄청난 작업량 때문이었다. 내가 힘들게 수요일에 사무실을 찾아간 것은, 팀장이 퇴사하겠다고 해서 팀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을 것이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팀장도 주말 없이 일을 많이 해왔는데 너무 힘들다고 했다.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니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팀 입장에서는 그래도 선장을 잃는 격이었다. 당분간은 선장 없이 배를 항해해야 했다. 그래서 재택시간임에도 회사를 나갔던 것이다.


나의 사무실 방문은 지루하고 힘겨운 작업 시간에 나타난 작은 이벤트와 같았다. 갑자기 팀 분위기가 밝아졌다.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팀원들과 대화를 하면서 에너지를 얻었다. 다들 웃으면서 나를 반겨주었다. 책상도 사라지지 않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술하러 가면서 목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상 모니터를 높이는 모니터 받침대를 주문했었는데, 그것도 팀원이 이미 다 설치해놓았다.


그 환대의 힘으로 지하철이 붐비기 한 시간 전인, 오후 다섯 시에 사무실을 나왔다. 내일(목요일) 실밥을 뽑고, 태풍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집으로 가서 재택으로 일을 하겠다고까지 말을 했다.


환대의 힘은 컸다. 나무며 참새, 지하철과 풍경에 이어 팀원들은 나에게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주었다. 사실 나는 타인의 삶에 시큰둥했다. 책으로 읽는 타인의 삶에는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면서도, 곧 헤어질 사람, 보지 않을 사람, 깊이 사귈 수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면 스스로 그만큼의 거리를 두었다. 일을 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이니까 딱 그 정도만 거리를 가까이해야겠다, 하는 마음이어서 그 정도로만 마음을 주었다. 그러면서 친구가 없다며 스스로 외로워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었지만 진심어린 마음으로 환대하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깨달았다. 만약 내가 사무실에 앉아 일하다가 팀원이 일주일만에 나타났다면, 살짝 일어나 반갑게 맞아주고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고 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금방 자리에 앉아 일에 다시 몰두할 것이었다.


어색해하고 민망해하고 낯설어할 때, 소심한 성격이라며 삐죽거리며 앞으로 잘 나오지 못할 때, 환하게 웃으면서 먼저 손을 내밀어야겠다. 환대의 손. 계산과 가식이 없는 순수한 손. 내가 먼저 그 손이 되어야겠다. 환대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비가 내린다.

비는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고, 안으로 들어가 숨게 한다.


비도 마찬가지다. 비는 스스로 땅에 스며들어 숨는다.

농부말고는 환대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숨는 것일까.

그 외로움이 쌓이고 쌓여 가끔 미친듯이 퍼붓고 둑을 터뜨리는 것일까.


하지만 비가 없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비가 내리면, 비도 즐거워하며 환대해야겠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간다고.


사실, 가장 큰 환대는

가족의 환대다.


지친 몸 이끌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가족이 있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뛰어나가 환대를 하고 맞이해주라.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침대에서 책읽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