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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Mar 20. 2024

[퇴사가 아니고 퇴직입니다] 아빠 없으면 안 돼!

2024년 3월20일(수)

오후 3시20분. 오후가 다 끝나는 이 시간에 겨우 출근했다.


퇴직했다면서 출근이라니. 사람들 몰래 어디 취직이라도,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얻었단 말인가? 깜짝 놀랄 분도 있겠지만, 출근한 곳은 우리집 거실 창가, 햇살이 바로 드는 양지바른 테이블이다.




햇살 받으면서 쉬는 게 좋아 가족의 허락을 받아 만든 나만의 공간이다. 이렇게 만들어 놓으니 딸들도 퇴근하고 와서 가끔 사용하기도 한다. 안방에 데스크탑 컴퓨터와 모니터가 있는 큰 책상이 하나 있다. 하지만 여긴 뭐랄까, 안방 책상이 업무 장소라면 여긴 마치 음악이 흐르는 카페 같은 곳이다. 젊은 친구들이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와서  음료 한 잔 시켜놓고 흐르는 음악에 자신을 맡긴 채 일하는 그런 펍 같은 느낌이 나는 곳? 표현이 조금 과한 부분이 있지만 내게 이곳은 퇴직하고 이사하고 만들어 낸 나만의 작업 공방이다. 지금 퇴직 일기 역시 이 테이블에서 노트북을 열고 음악을 들으며 쓰고 있다. 이만하면 멋진 공간 아닌가? 굳이 비싼 돈 들여서 카페 가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는 생각이다.




음료는 어느 카페에서도 팔지 않는 돼지감자다. 내 건강을 염려한 아내의 특별 선물이다. 투명하지만 노란 색감이 테이블과도 잘 어울린다. 지금은 집에 아무도 없다. 모든 가족이 일하러 나간 상태이다. 나는 이 오후 햇살을 즐기며, 바흐 음악을 틀고 돼지감자차를 마시며 퇴직일기를 쓰고 있다.




서두에 출근?이 늦었다고 했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제목이 뭔가. 바로 퇴직한 아빠의 존재감 뿜뿜 나는 "내가 없으면 집이 안 돌아가지"다. 집이야 퇴직한 아빠가 없어도 잘 돌아갈 것 같지만, (물론 지금까지 잘 돌아갔다. 퇴근 후 처리한 일들이 많다.) 가끔 어떤 경우에는 반드시 평일에 시간을 내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퇴직한 아빠는 이럴 때 유용하다. 반드시 집에 도움이 되는 존재감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 임무는 무선청소기 서비스센터에 가서 고장난 부분을 고쳐 오는 것이다. 월요일에 서비스센터에 전화했는데 수요일 오전 10시에 예약이 가능하다고 해서 오늘 그 일을 하러 가게 된 것이다. 지난 주부터 바닥을 청소하기 위해 청소기를 구동시키면 바퀴 롤러 부근에서 계속 드르륵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나고 청소가 되지 않는 증상을 보여왔다.



아내는 현미쌀이 다 떨어졌다며 오는 길에 현미쌀과 두부를 사다줄 것을 요청했다. "이번 달 돈 다 떨어졌어." 나는 작아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달 150만원으로 생활할 수 있다며 아내에게 큰소리치고 시작한 3월, 20일이 되기도 전에 통장은 0원이 되었다. 어제 다이소에서 커튼봉과 의자다리 고무덮개를 사면서 잔고 7000원은 행방을 감추었다. 아내는 어디선가 받아놓은 상품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LG전자 서비스센터는 자동차로 30여 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최근 수원에 완공된 스타필드로 인해 교통 복잡도가 훨씬 커진 도로였다. 10시 예약이었지만 10시5분경에 도착했다. 접수를 하고 들어가니 예약 없이 A/S를 받으러 온 사람들이 먼저 접수하고 진행하고 있었다. 예약이 없어도 되는 거였나? 괜히 예약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행 현황판에 '예약'이라는 꼬리표를 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건 친절한 직원으로부터 롤러의 고무패킹이 벗겨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모터가 손상되어 회전 되지 않는다는 얘길 들었다. 아니 산 지 2년밖에 안 됐는데 모터가 손상되는 게 일반적인가? 따져 물었더니, 뭐 물이 들어간다든지 그러면 손상이 될 수 있는데 자기는 모르겠다며 어물쩍 넘겨버린다. 그러면서 옆에 부품도 마모되어 전체를 교체하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교체를 다 하면 6만9천원 가량의 금액이 발생한단다.




잠시 갈등을 했다. 이미 이번 달 사용 금액을 모두 써버린 상태여서 체크카드로 결제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결국 퇴직 이후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한 신용카드를 꺼내어 결제했다. 마음속으로는 다음달 금액을 가불해쓰는 거야,라고 나를 합리화시켰다. 계속 소비를 억제하면서 월150만원 생활을 지킬 것인지, 소득을 어떻게든 늘여서 월 200만원 생활로 조금 여유를 가질 것인지는 좀더 지켜보고 따져봐야 할 것이다. 크몽 앱을 통해 100만원 가량 생기던 일거리가 이번달 들어서는 단 한 건의 의뢰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4월부터 시작하기로 한 글쓰기 강좌에 2명의 수강생이 확정되면서 최소 4월 수입 100만원은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수강료는 3개월 분이기 때문에 3으로 나누면 33만원 가량밖에 되지 않아 150만원의 고정수입은 꿈이 될 수밖에 없다. 돈 생각은 잠시 접어두자.




오늘의 두 번째 미션, 현미쌀 사기를 해야 한다. 상품권 사용이 가능한 이마트로 향했다. 카트를 끌고 이리저리 구경 겸 돌아다녔다. 왠 아주머니가 나를 흘깃 보며 지나간다. 그 순간 현타가 왔다. 아, 이런 낮에 이렇게 카트를 설렁설렁 끌고 다니는 남자는 누군가. 바로 직장도 없는 백수가 아닌가. 이 시간에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정상적이지 못한 남자의 모습으로 비쳐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얼른 카트를 끌고 사기로 한 현미쌀과 두부를 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큰딸이 혼자 점심을 먹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큰딸은 바이올린 레슨 강사인데, 오전에 시간 여유가 있어 자주 점심을 같이 먹는 편이다. 오늘은 시간상 아빠를 기다리기 힘들어 먼저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나는 큰딸이 먹고 나간 식탁 위에 아내가 정성들여 만들어 놓은 된장찌개를 끓이고 모듬쌈을 꺼내 나만의 점심 밥상을 차린다. 혼자 먹으면 이상하게 급하게 먹게 된다. 왜 그런지 나도 잘 모르겠다. 급할 것도 없고 빨리 먹고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지 이상한 습관이 들었다. 그래서 빨리 먹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계속 스스로에게 인지시키면서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훈련을 하는 중이다. 다음 달 피검사를 통해 당뇨병 진단을 받지 않으려면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


점심을 먹고 나자 오늘이 수요일, 그러니까 재활용품 수거일이라는 생각이 났다. 예전 아파트에서는 정해진 요일 없이 언제든지 재활용품을 버릴 수 있어서 좋았다. 이번에 새로 이사 온 오래된 이 아파트는 수요일 오후부터 목요일 오전 9시까지 재활용품을 받는다. 종이류, 플라스틱, 비닐, 스치로폼이 기본이고, 캔 같은 철, 음료수병 같은 유리, 그릇 깨진 것 같은 사기,도기류 등이 부가적인 재활용품 쓰레기들이다. 택배가 많이 오는 날은 종이박스가 많이 생기는데 좁은 집안에 계속 보관하려면 어떻게든 공간을 확보해놓아야 한다. 내용물이 많으면 아내가 퇴근하고 와서 같이 버리러 나가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다지 많지 않다. 아내가 오기 전에 혼자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안방에 들어가자 다리미가 자리를 잃은 채 방바닥에 놓여 있었다. 아침 출근길에 급하게 다림질을 하던 아내가 떠올랐다. 나는 다리미를 챙겨 원래 들어가야 할 자리로 넣었다. 그리고 인터넷 설치를 하면서 기사가 두고 간 인터넷 선을 쫄대를 가지고 깔끔하게 정리했다. 아빠는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재활용품 쓰레기를 처리하러 나가는 김에 일반쓰레기봉투 2리터짜리도 꽉 채워서 함께 버리고, 음식물 쓰레기도 버리고 와야 한다. 서너 번은 왔다갔다 해야 이 모든 일을 다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일에 신경을 쓰는 가족은 없다. 모두 아빠가 알아서 다 처리해주겠지 하고 생각한다. 표시도 나지 않고 칭찬 받을 일도 아니지만, 이런 일은 퇴직한 아빠가 모두 다 한다. 내게 주어진 일, 보이진 않지만 내 존재감이 살아나는 일. 그래서 나는 이런 일들을 기쁘게 한다.



"아빠가 없으면 집이 안 돌아간다니까."하고 혼자 생색을 낸다.



마침 가족 채팅방에 막내 딸에 저녁 여섯 시에 당근 하나 보내줄 수 있냐고 글이 올라온다. 나는 재깍 답을 단다. "아빠 대기 중~~"



나는 집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아마 내가 없다면 온 집안이 쓰레기로 가득 차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글을 쓰는 데 어느새 4시가 넘었다. 이제 재활용 쓰레기랑 음식물 쓰레기 버리고 오면, 진짜 내 일을 해야겠다.



오늘은 하루가 이렇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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