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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Mar 13. 2024

[퇴사가 아니고 퇴직입니다] - 모듬쌈 사랑

퇴직일기 2024년 3월12일 화요일(2)



내일 도착할 줄 알았던 1kg 모듬쌈이 오늘 와버렸다. 내일 올 줄  알고 낮에 간 마트에서 저녁에 먹으려고  부드러운 상추를  2300원에 사 왔는데 겹쳐버렸다.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2300원. 안 사도  되는데 샀다고 생각하니 아까운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2300원이 아무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가끔은 그것이 너무 억울해질 때도 있는 법이다.



퇴직하고 집에만 있으니 뭔가 삶에 변화를 줄 변수가 있을 리 만무한 그날그날 생활같지만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은 상추조차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내일 모듬쌈이 왔다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을 것이다. 오늘 저녁에는, 엊그제 아내가 너무 보드라워 맛있다며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 상추로 맛있게 저녁을 먹고,  반 정도 남긴 것은 내가 내일 점심에 먹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고나면 오후 늦은 시간에 택배가 현관 문 앞에 배송되었습니다 라는 문자가 오고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모듬쌈을 받아 다시 저녁쌈으로 준비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 점심을 먹고 부드러운 상추를 사 왔는데, 상추를 포함한 1KG 모듬쌈이 도착해버린 것이다. 스티로폼 상자를 식탁 위에 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계를 보았다. 오후 다섯 시.



어제 아내가 집에 와서 저녁 식사를 차려 먹고는 옷도 벗지 못한 채 곯아 떨어진 것이 생각났다. 하루를 고단하게 일하고 오는 아내를 위해 내가 쌈을 씻어놓자. 어차피 내가 가장 많이 먹지 않은가.



나는 팔을 걷어 붙이고 쌈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판매할 때도 10여종의 모듬쌈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몇 종류의 쌈인지,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른다. 상추, 케일, 로메인, 겨자 정도만 알 뿐이다.



예전에 대충 물에 흔들어 씻었다고 먹다가 흙이 바그락 입 안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나면서 뱉어낸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꼼꼼하게 씻었다. 큰 소반에 수도꼭지를 틀어 일정한 양의 물을 담아 놓은 뒤 약하게 수도꼭지를 열어 흐르는 물과 담기는 물을 동시에 이용하여 채소에 묻어있는 이물질을 씻어낸다. 손에 잡히는 이물질은 없는데 나중에 보면 소반 밑에 흙들이 자글자글하다.



거의 삼십 분을 소요했다. 허리가 지끈하다. 물을 탈탈 털어 모듬쌈 전용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는다. 1KG은 적은 양이 아니다. 다 담아둘 용기는 없다. 잎들이 커서 작은 용기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김치용 용기를 꺼내 몇 가지씩 담아둔다. 결국 나머지는 그냥 소반째 남겨두었다.





1KG이라고 해도 점심 저녁으로 먹으면 금방 사라진다. 그렇다고 2KG을 사기엔 보관해둘 장소가 없다. 불편하더라도 1KG씩 자주 사서 먹어야 한다. 나는 다른 반찬이 없어도 모듬쌈만으로 밥을 먹을 수 있다. 밥과 채소, 쌈장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건강을 위해서 쌈 위에 아내가 사랑으로 만들어준 다양한 반찬을 얹어 같이 먹는다.



한달 뒤에 당뇨 검사를 위해 병원을 가야 한다. 현미밥과 채소 중심으로 식단관리를 잘 하고, 식사 후에는 꼭 30분 이상 간단하게라도 운동해야 한다. 오늘은 아침 점심 잘 지켰는데, 저녁에도 게으름 피우지 말고 꼭 밖으로 나가야겠다. 싱싱한 채소들이 아름답다.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골치 아픈 니체 책읽기는 잠시 뒤로 밀쳐둔다.


푸르고 싱싱한 풀잎들을 보며

저 싱싱한 풀들이 내 입을 통해

위와 대장을 거쳐

내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 줄 생각을 하니

입가에 웃음이 절로 걸린다.


나는 어느새 아내의 칭찬을 기다리는 남편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도 그 말을 기다린다.

상추 어디서 샀어?

참 보드랍고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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