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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May 09. 2024

(책꼬리단상) 한 번 일어선 아기는 다시 기지 않는다

황현산, 모르는 것이 많다

[한 번 일어선 아기는 다시 기지 않는다]




애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한번 일어선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기지 않는다. 무릎이 자주 다치긴 하지만.



일어설 만큼 성장했다는 것은 무릎이 깨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는 말도 된다. (황현산,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29)




오래 전에 읽었던 책. 밑줄 그은 부분만 살펴보다가 가슴이 따끔해지는 글귀를 만났다. '한번 일어선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기지 않는다.'



발달단계로 보면 아주 당연한 말이다. 나는 사회복지와 상담을 공부하면서 아동발달 단계별 특징과 심리적 발달 특징을 공부했다. 삐아제 이론과 다양한 심리학적 이론들을 공부하면서 아이가 퇴행 상태를 보인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이가 이전의 발달단계로 되돌아가는 경우는 동생이 태어나 사람들의 관심이 동생에게로 쏠릴 때 대부분 나타난다. 그러면 다 큰 아이가 밤에 오줌도 싸고, 어린아이처럼 손가락을 빠는 행동들을 한다. '퇴행'하는 것이다. 동생보다 더 관심을 받으려고, 더 사랑을 받으려고 그런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아이가 작심하고 그런 행동을 하는것은 아니다. 무의식 속에 있는 그 무엇이 아이로 하여금 퇴행 행동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런 퇴행 행동은 청소년이 되어서도 나타난다. 관심을 받기 위해서 일탈을 하는 것이다. 사람으로 인정해 달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그래서 일탈 행동을 하는 청소년을 상담하는 선생님들은 그런 아이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그래서 기다려준다. 지금까지 인정받지 못했던 그 인간성을 존재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고 무언의 말을 전달해 준다. 관심을 받고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본능처럼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퇴행을 한다고 해도 한번 일어난 아이가 다시 기어다니는 퇴행 행동은 하지 않는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분에게 물어보니, 걸어다니다가 옆에 있는 아기가 기어 가면 놀이의 하나로 따라 하는 경우는 있다고 한다. 하지만 퇴행의 의미로 걷던 아이가 엎드려 기어가지는 않는다. 대소변을 잘 가리던 아이가 대소변을 못 가리게 되는 퇴행도 있다. 갑자기 엄지 손가락을 입속으로 집어넣어 빨아대는 아이도 있다. 가만히 이 글을 곱씹어보니 학교에서 퇴행 현상을 공부할 때도 다시 기어다니는 아이로 되돌아갔다는 내용은 듣지 못했다.  보통의 발달단계를 거치는 아이라면 절대 그런 퇴행은 하지 않는다. 걸어다니는 것이 기어다니는 것도 훨씬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넘어질 듯 뒤뚱거리며 걸어 가더라도, 걷다 넘어져 무릎이 아프더라도 다시 일어나 걷는다. 결코 다시 엎드려 누워 기는 방법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마치 이전에 자신이 기어다니는 행동은 한번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두 발에 힘을 주고 씩씩하게 걸어간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보니, 의외로 마음속 발달이 기어다니는 수준으로 퇴행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생각이 좁아지고 자신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도 바퀴벌레처럼 구석으로 숨어버린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다. 자신이 받은 상처만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어린아이로 돌아가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문제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이 그런 상태다. 문제가 생겼는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만 속을 태운다. 그래서 오늘, 목요일마다 하는 어린이예배에 목사님을 도우러 가지 않았다. 나는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고 다른 방법으로 회피하고 있는 셈이다. 어린아이처럼 다시 기어다니려 하고 있다. 하루종일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가슴은 계속 나를 짓누른다.



황현산 작가의 말에 따르면, 나는 무릎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기어다니는 어린아이와 같다. 일어선 줄 알았는데 아닌 것이다. 어른들 손을 잡지 않고, 벽을 잡지 않고는 혼자 일어서지 못한다. 겁이 나서 손을 떼지 못한다. 넘어질까 두려워, 넘어졌을 때 경험한 그 고통을 기억하고 감히 손을 놓지 못한다.



오늘 <공황장애가 시작되었습니다>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그걸 극복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저자가 공황장애를 앓게 되는 일련의 사건을 읽으면서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내 가슴도 저자의 그때 그 순간처럼 심한 흉통이 느껴졌다.



"겨우 4교시까지 수업을 마치고 남편과 병원에 간다 피해 의식과 불안지수가 굉장히 높은 검사 결과를 받아든다. 신경정신과 약을 일주일 치 처방받는다. 완전히 지쳐서 집에 돌아온다. 약을 먹고 잠이 든다. 그러나 10분에 한 번꼴로 잠이 깬다. 계속되는 악몽에 피가 마르고, 진짜 이러다 미치거나 죽을 것 같다는 기분에 휩싸인다. 밥도 여전히 제대로 못 먹고 있다. 잠이라도 푹 자고 싶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분노의 빨간 눈'이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있다. 다음엔 수면제를 처방받아야겠다." (공황장애가 시작되었습니다, 52쪽)




나도 처음에는 신경안정제, 항불안제, 항우울제 약만 처방을 받았다. 그런데 몸이 좋지 않다 보니 잠까지 영향을 받았다. 결국 수면제까지 처방 받아 지금까지 6개월째 쭉 먹고 있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잘 수 있다는 건, 겉으로는 좋아진 것 같은데, 실은 아직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안 된 것을 뜻한다. 이번 주부터 수면제 한 알을 반으로 쪼개서 한 번은 반 알만 먹고 한 번은 다 먹고 한 번은 아예 안 먹고 잠을 자보고 있다. 나 스스로 수면 생체실험 중이다.



사실 이번에 일어난 일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다보니 하루종일 우울하다. 가슴떨림이 진정되지 않는다. 문제 당사자는 어쩌면 편히 숨 쉬고 잠을 잘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불편한 마음으로,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고 가슴을 압박하는 불안함으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제 곧 아내가 올 것이다. 나는 웃으며 아내를 맞이할 것이다. 의연하게 하루를 잘 보냈다고 보고를 할 것이다.



한번 일어선 아기는 다시 기어다니는 퇴행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오늘 나는 어쩌면 이 글귀를 붙잡으려고 괜히 오래 전 밑줄 그어넣은 글들을 읽어봤는지 모르겠다. 황현산 씨의 그 책은 트위터가 한창 유행할 때 그가 트위터에 올린 글들을 묶어 책으로 낸 것인데, 짧은 글 속에 많은 지혜가 담겨 있어 많은 분들에게 리트윗되곤 했다. 하지만 정치적인 부분과 종교적인 부분에서 나와 가치관이 많이 달라 좋은 글귀만 옮겨 놓고 책은 누군가에게 주었다. 그런데 딱 이 문장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때론 한 문장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마치 선지자가 나타나, 다시 퇴행 단계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신의 계시를 전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문장 하나로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린다. 나를 다시 공황 상태로 밀어넣을 수는 없다. 모든 식구의 기도와 간청을 외면한 채,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며 스스로 목을 몸속으로 집어넣어 버리는 거북이처럼 그렇게 세상과 단절할 수는 없다. 거짓된 감정으로 아내를 맞이하지 않고, 진실로 기쁜 마음으로, 퇴근하고 돌아오는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 나는 일어서고 있고, 손을 떼고 있고, 걸으려고 발에 힘을 주고 있다. 아마 내일은 벌떡 일어서서 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도 그럴 것이다. 일어섰으면 다시는 엎드리지 말자. 걷기 시작했으면 계속 앞으로 걸어가자, 다시 기어갈까? 고민도 하지 말자. 그건 사람이 생각할 수준의 생각이 아니다. 어린아이도 하지 않는 그런 행동을 어른이 한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다. 



일어났는가? 그렇다면 걸어라. 


드러누울까? 머리에 생각하는 순간 뇌는 자신을 그쪽으로 이끌 것이다. 그것이 편해 보이니까. 그러니 결코 그딴 생각, 꿈조차도 꾸지 말 일이다.



걷기 시작했는가? 힘들면 잠시 멈춰 서서 경치를 바라보고 벤치에 앉을지언정 벌러덩 눕지는 마라. 다시 일어서기가 정말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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