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성공과 행복의 모습]
나는 제니퍼에게 말한다. "나는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어."
제니퍼는 뭔가 심오한 말을 하거나 도망갈 궁리를 하는 사람이 그러하듯 잠시 말이 없었다. 다행히 제니퍼의 경우에는 전자에 해당됐다.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제니퍼가 말했다.
...
보통 들은 질문을 그대로 다시 물어보면 사람들은 질문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하지만 제니퍼는 아니었다. 내 질문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내 머리를 강타했다. 성공이 어떤 모습이냐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늘 성공을 미적 측면이 아닌 양적 측면으로만 여겼다.
질문의 프레임을 어떻게 구성하는가가 중요하다. 제니퍼는 "왜 성공하고 싶어?"라거나 "얼마나 성공해야 충분한 건데?"라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 왜 성공하고 싶으냐고? 그냥, 다들 그렇지 않나? 얼마나 성공해야 충분하냐고? 지금 나보다 더.
하지만 제니퍼는 네게 그렇게 묻지 않았다. 성공이 어떤 모습이냐고 물었다. 제니퍼의 질문에는 개인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성공은 나한테 어떤 모습이지? 그 모습을 본다면 내가 알아차릴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71쪽)
5년여 전의 일이다.
회사 대표와 출장을 갔다 오면서 대표가 운전하는 차량 안에서 팟캐스트를 듣고 있었다. 무슨 팟캐스트인지 모르겠는데 대화 중에 내가 "저는 실패한 인생을 산 것 같습니다."라고 내뱉었다.
대표는 깜짝 놀라며 "아니, 부장님이 실패했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하면서 나에 대해 반박을 했다.
그때 나는 성공과 실패를 책의 저자처럼 양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50대 중반이었지만 여전히 부채를 많이 안고 있었다. 매달 주택 대출금을 갚느라 빠듯빠듯하게 살았다. 책을 사는 것 말고는 다른 경제적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25평 집이 하나 있었지만 대출금을 빼고 나면 마이너스 인생이었다.
나는 결코 성공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른 동년배와 비교해봐도 그랬다. 언젠가 누군가가 그랬다.
50대에 아직 집도 없고 빚만 가지고 있으면 인생 헛 산 거 아냐?
누군가 지나가는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나에게 날아온 화살촉이 되어 내 심장에 박혔다. 나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 모임에서 내 말수는 현저하게 줄었고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나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 삶은 이미 충분히 힘겹다. 그런데 성찰까지 하라고? 성찰하는 삶. 나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러므로 감히 내가 소크라테스의 성찰하는 삶에 따르는 필연적 결과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결과 1번 : 실질적인 결과를 내지 못하는 성찰하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결과 2번 :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건 지나치게 성찰하는 삶도 마찬가지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행복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곧 행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말로 쾌락의 역설을 설명했다. ... 행복은 부산물인지, 절대 목표가 될 수 없다. 행복은 삶을 잘 살아낼 때 주어지는 뜻밖의 횡재 같은 것이다. (76)
소크라테스의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말은 오늘 내게 위안을 준다. 사실 나는 아침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성찰한다. 그 말씀을 되뇌이며 나를 붙잡는 하루의 지렛대로 삼는다. 가령 오늘 아침은 디모데전서를 묵상했는데, .... 에 대한 부분을 마음에 붙들었다.
기독교 모 출판사 카페에 말씀 묵상한 부분을 올리고 있는데, 오늘 마지막 두 문단은 이렇게 끝을 맻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보는 평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진리와 기둥의 터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일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전화로 통화하고, 카톡으로 대화를 나눌 때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진심으로, 아름다운 사랑으로 말하고 대화를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보니 나는 저자가 성찰하는 삶에 따른 두 가지 결과,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실질적인 결과가 반드시 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늘 성찰하며 살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또 지나치게 성찰하는 삶은 아니다. 회사에서는 일에 집중하여 주어진 일정보다 늘 앞서 나가며 미리미리 일을 처리하고 있다.
그는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행복하냐? 그러면 불행을 깨달을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행복하냐?"는 질문에 이제는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다. 행복에 대해 정의를 내린 그대로, 나는 행복을 좇으며 살고 있지 않고, 하루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다보니, 자연스럽게 언제나 "행복하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오늘 하루, 좋은 글과 말로 하루를 성찰하며, 행복한 하루를 엮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