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

by 봄부신 날

[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


한줄평 : 아버지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역사의 계승


쓰고 나니 한줄평이 좀 무겁다.

책은 작고 얇고 가벼운데.

(책을 보면 누구라도 사고 싶어지는 책이다. 길이는 내 손바닥만하고 너비는 내 손바닥을 좌악 편 너비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표지와 속지에 그려져 있는 대만의 가오 엔 그림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글을 읽지 않아도 손을 뻗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책이다.)



2024-11-23 고양이를 버리다1.png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하는 재즈처럼 즉흥적이지 않다.

오래 고심하고 재고 있었지만 글문이 트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고양이를 보면서 아버지와의 연결고리가 떠올랐고 그제야 글은 묵은 때를 벗겨내듯 술술 흘러 나왔다.


나는 지금도, 지금에 이르러서도, 아버지를 줄곧 실망시켰다, 기대를 저버렸다 하는 기분을-또는 그 잔재 같은 것을-품고 있다. (61)


그는 성인이 되고 나서, 보다 정확히는 전업작가가 되고 나서 아버지와 의절하듯이 보지 않았고, 그래서 무언가 풀어야 할 빚 같은 것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빚은 글로 표현해야 작가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일 텐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90세가 되고 그는 60이 넘어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뵈었다고 한다. 온 몸에 암 덩이가 퍼지고, 심각한 당뇨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 앞에서 그는 주절주절 해묵은 빚 같은 걸 털어놓으며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이야기는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고양이에 관한 두 개의 추억.


나 역시 오늘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바로 리뷰를 쓸 것인가, 좀 묵혀 두었다가 쓸 것인가 고민하고 쟀다. 밤 12시가 지나가고 있다. 잠들기 전에 써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그가 아버지의 글을 쓰는 것이 힘든 것처럼 나 역시 이 책에 대하여 무언가를 쓴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는다. 책은 고작 99쪽밖에 되지 않는데, 정말 얇고 별 이야기도 없어 보이는데, 그렇다. 게다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 가오 엔 그림, 작고 앙증맞은 책. 이런 조합만으로도 이 책은 의미가 있다. 게다가 지금 나는 1952년에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류이치 사카모토의 피아노 음악을 듣고 있지 않은가. 연주자는 서양인이지만 그는 사카모토의 음악세계를 완벽히 구사해내고 있는 것 같다. 책이랑 너무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나는 잔잔하다고 생각하며 듣고 있는데, 막내 딸이 와서는 왜 이리 절망적인 음악을 듣고 있냐고 핀잔을 준다. 이게 절망적인 음악이라고? 피아노 현의 맑고 투명한 소리와 진중하고 묵직한 소리가 어우러지는데, 묵직한 피아노 음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나 보다.



2024-11-23 고양이를 버리다2.png


이 글이 사카모토의 피아노처럼 잔잔하면서도 생각보다 무겁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그가 작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전쟁의 상흔과 그로 인한 역사의 계승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야기지만 그것이 모여 동시에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역사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추적하고 밝혀낸 아버지의 삶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역사로 계승되고 아버지의 트라우마가 자신에게 전승되어 자기도 모르게 작품 속에, 그리고 미래로 흘러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에서 쓰고 싶었던 한 가지는, 전쟁이 한 인간-아주 평범한 이름도 없는 한 시민이다-의 삶과 정신을 얼마나 크고 깊게 바꿔 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내가 이렇게 여기에 있다. 아버지의 운명이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경로를 밟았다면, 나라는 인간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라는 건 그런 것이다.-무수한 가설 중에서 생겨난 단 하나의 냉엄한 현실.


역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의식의 안쪽에서 또는 무의식의 안쪽에서, 온기를 지니고 살아있는 피가 되어 흐르다 다음 세대로 옮겨 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쓰인 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작가 후기. 96~98)



이야기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암고양이 한 마리를 해변가에 버리러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양이를 버리게 되었고 아버지와 같이 버리고 갔는데, 집에 돌아오니 그 고양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툇마루에서 고양이와 함께 햇볕 쬐는 걸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왜 그 고양이는 해변에 갖다 버려야 했을까?

왜 나는 그 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그건 -고양이가 우리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 지금도 하나의 수수께끼다. (16)


우리는 그 여름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줄무늬 암고양이를 버리러 고로엔 해변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고양이에게 추월당했다. 뭐가 어찌되었든,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해안의 파도 소리를, 소나무 방풍림을 스쳐 가는 바람의 향기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런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87)


사실 나도 거의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집은 없었다. 우리는 대부분 지금의 길고양이를 도둑고양이라고 불렀다. 당시 도둑고양이는 담장을 어슬렁거리며 다니다 생선 냄새를 귀신 같이 맡고서는 그 귀한 생선을 몰래 도둑질해가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다들 고양이를 보면 바깥으로 쫓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하필 우리집 담장에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기 집으로 삼으려는 것인지 하루종일 다른 곳엘 가지 않고 거기서 어슬렁거렸다. 고양이가 눈에 거슬린 어머니가 나보고 바깥에 버리고 오라고 했다. 나는 동생과 함께 이골목 저골목 나름 머리를 쓰며 뱅글뱅글 돌아서 어느 골목 어귀에 내려놓고 왔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벌써 고양이가 담장에 올라가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고 머리가 쭈뼛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이게 무슨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강아지처럼 가는 길에 소변을 눈 것도 아니고 헨델과 그렌델처럼 가면서 과자를 떨어뜨려 놓은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동생과 나는 조금 더 먼 곳에 가서 고양이를 다시 내려 놓고 왔고, 고양이는 역시 우리보다 먼저 집에 와 있었다. 정말 식겁한 동생과 나는 세 번째에 작심을 하고 거의 30분 가량을 걸어서 혼잡한 시장통에 내려놓고 왔다. 그 이후 우리는 그 고양이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는데, 지금도 그 고양이를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기억의 전승, 역사의 계승 같은 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세 번이나 징집 차출당하여 중국, 버마, 필리핀에 가서 전투를 치렀다. 일본이 한창 제국주의의 총칼을 높이 세웠을 때이다. 평소 말이 없었던 아버지지만 딱 한 번, 하루키에게 포로로 잡은 중국인을 죽여야 했던 상황을 이야기한다. 딱 한 번 들었지만 하루키는 그 이야기가 일종의 트라우마로 아버지에게서 전승되었다고 믿는다. 아버지에게 평생 짐으로 얹혀졌던 그 트라우마가 그대로 하루키에게로 계승되었다고.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51)


그러면서 그는 '만약에' 놀이를 시작한다. 만약에 아버지가 조금만 일찍 군에 가서 전사했더라면, 어머니와 만나지 못해 결혼을 못했다면, 그랬다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자기가 쓴 소설도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역사는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아찔한 상황을 상상한다.


만약 아버지가 병역에서 해제되지 않아 필리핀이나 버마 전선으로 보내졌다면..... 만약 음악 교사였다는 어머니의 약혼자가 전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해가다 보면 정말 기분이 묘해진다. 만약 그랬다면, 나라는 인간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89)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93)


스스로를 우연의 산물로 보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을 살펴볼 때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가 우연이라고 보는 그 우연이 사실은 필연이고 그래서 하루키가 태어난 것이고, 그의 위대한 작품들을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하루키는 아버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나만 잘못 연결되었더라도 자기가 지금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인데 하며, 놀라워한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다. 우리 아버지가 직업군인을 하면서 광주에만 가지 않았다면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나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이렇게 하루키의 글을 읽고 후기를 적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많은 고뇌와 상상과 역사와 우주와 생명의 경외함을 맛보았으리라. 하루키의 그 마음을 나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아버지와 데면데면했고,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에 대해 좀더 많은 걸 알았다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를 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만 중요했지 아버지의 삶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청춘, 원산 앞바다에서 늘 보였다는 그 고래 이야기. 그런 것들을 조금 더 들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나도 하루키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로부터 전승 받은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고, 자녀에게 물려줄 역사의 물줄기가 있을 테니까.


나는 아버지와 고양이에 얽힌 추억은 없다. 솔방울 추억이 있긴 한데 그걸로 하루키만큼의 글이 나올지는 모르겠다. 언젠가는 한번 짧은 단편으로 써 보리라.


99쪽밖에 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이렇게 긴 후기를 쓰는 것도 처음이다. 아직 다 하지 못한 이야기는 책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한번 읽어보시길~~



2024-11-23 고양이를 버리다3.pn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버려진다는 것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