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이 키건의 "맡겨진 소녀"
[맡겨진 소녀] - 클레이 키건
한줄평 : 함축과 축약의 이미지가 긴장과 완성도를 높이는 놀라운 성장 소설
저자가 '긴 단편 소설'이라고 말하는 단편과 중편 사이에 있는 짧은 소설이다. 양장본으로 책이 만들어졌지만 우리나라 책으로도 100쪽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야기를 구성하는 시간과 공간도 매우 한정적이고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쉽게 읽어 내려가기가 어렵다. 작가가 '애쓴 흔적을 들어내는 데 많은 공'을 들인 작품이기에 우리는 읽으면서 단어가 주는 느낌과 이미지에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서사를 중심으로 읽어간다면 이 책은 두어 시간이면 후루룩 다 읽어낼 만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읽어보면 알 수 있듯 이 책은 그렇게 읽을 수가 없고 그렇게 읽어서도 안 된다.
아빠는 왜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없이,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없이 떠났을까? 마당을 가로지르는 묘하게 무르익은 바람이 이제 더 시원하게 느껴지고, 크고 하얀 구름이 헛간을 넘어 다가온다. (21)
서사는 아빠가 주인공을 친척집에 장기간 맡기면서도 아이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매정하고 아빠로서도 빵점이다. 그렇지만 서사를 통해 이해하는 아빠에 대한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넘어 곧바로 서술되는 주변 배경에 대한 아이의 생각을 통해 독자는 또 다른 세상과 서사를 만난다.
'묘하게 마당을 가로지르는 무르익은 바람' 이 주는 이미지. 더 시원하게 느껴지는 바람이 의미하는 것, 크고 하얀 구름이 헛간을 넘어 다가오는 것에 대한 풍경이 주는 이미지의 변화를 생각한다. 독자는 이미지를 구성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말은 하지 않지만 맡겨진 아이에게서 발현되는 것으로 서사와 다름 없는 중요한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다 잊어버리는군." 킨셀라 아저씨가 말한다. "금방 옷을 갈아입혀 주마."
"하지만 열두 달 지나면 다 잊어버리겠지." 아주머니가 우리 아빠를 흉내 내며 말한다. (22)
여기가 두 분이 주무시는 곳이다. 왠지 모르지만 나는 두 사람이 같이 자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23)
더 이상 부연 설명이 없는 짤막한 대화나 혼잣말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는 다 쓴 다음에 최대한 덜어내기를 하는데 그 과정은 눈물겹다. 나는 작가로서 글을 쓸 때 그 눈물 겨운 덜어내기를 잘 하지 못한다. 고민하면서 써 놓은 그 장면, 그 문장이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훌륭한 작가는 욕심을 버리고 문장들을 버린다. 그래야 단촐해진 문장은 더 빛을 발한다. 클레이 키건은 기꺼이 그 작업을 수행했다.
욕조 물이 차오르자 흰 욕실이 어딘가 변해서 눈앞을 가린다. 전부 다 보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23)
이 한 문장을 길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생각한다. '전부 다 보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한 문장은 이 장면 속에서 그저 욕조 물이 차오르면서 아이가 느끼는 현상에 불과할 뿐이지만 작가가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라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음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짧지만 무언가를 암시하는 이러한 문장은 곧바로 독자에게 중요한 문장임을 깨닫게 하고, 그대로 각인된다. 아, 이 책은 전부 보여주는 책이 아니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눈 앞을 가리는 부연 김 속에서 스스로 이야기를 찾아내야 하는구나. 새삼 다짐하게 만드는 놀라운 문장, 보석 같은 문장으로 뇌리에 깊숙이 박힌다.
나는 책을 읽기 전 우연히 "말 없는 소녀"라는 제목으로 방영되는 영화를 먼저 봤다. 2024년 이 책이 예스24와 알라딘, 그리고 각종 도서 인풀러언서들의 블로그 등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제목과 영화의 장면을 보는 즉시 이 책을 영화화했다는 사실을 느낌으로 알았다. 그래서 나는 꽤 진지하게 영화를 봤다. 나는 책 재목이 '말 없는 소녀'라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소녀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말을 하지 못하는 소녀일 거라는 추측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간간이 소녀는 말을 했다. 영화에서 제목을 "말 없는 소녀"로 바꾼 이유는 어쩌면 책의 서사가 대화보다는 생각을 중심으로 서술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대화는 아주 필요한 경우에만 간략하게 언급된다. 그리고 중요한 대목은 생각을 표현하는 한 문장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매우 중요한 서술임에도 그 한 문장 외에는 부가적인 감정의 전달이나 설명이 거의 없다. 독자가 매우 예민하고 세심하고 그 부분을 포착해 내야 한다.
집에 도착하자 개가 일어나서 자동차 앞까지 우리를 마중 나온다. 나는 아주머니나 아저씨가 개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68)
작가는 영민하고 우리는 한 문장을 읽는 즉시 그 대화, 그 문장이 이 소설을 매우 중요하게 만들어 줄 변곡점임을 깨닫는다. 그건 놀랍고도 신비한 일이다. 우리는 책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느슨한 순간에 비범하게 그 장면을 포착해낸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라는 아저씨의 말 속에서 곧 그 말이 재현될 장면이 나오겠구나 직감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소설의 백미가 될 것이다.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아저씨가 말한다. ...
아저씨가 웃는가. 이상하고 슬픈 웃음소리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73)
너무 짧은 소설이어서 이 책의 줄거리를 밝히는 것은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에게 매우 송구한 일이어서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다만 '맡겨진 소녀' '말없는 소녀' 'foster'라는 원제목에서 이 책의 주인공이 어린 소녀이며 누군가에게 맡겨져서 보육을 받는 상황이라는 것 정도는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다른 성장소설과 다른 점은 아이가 다시 원래의 가정으로 금방 돌아간다는 것이다. 영원히 맡겨지는 것이 아니다. 방학 기간 동안 잠시 단 둘이 사는 친척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집에서 보살핌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 걷다가 절벽과 암벽이 튀어나와 바다와 만나는 곳에 도착한다. 이제 앞으로 갈 수 없으니 돌아가야 한다. 어쩌면 여기까지 온 것은 돌아가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73)
"그럼 돌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 아주머니가 말한다. "그렇지만 너도 알고 있었잖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를 본다.
"우리처럼 나이 많은 가짜 부모랑 여기서 영영 살 수는 없잖아."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불을 빤히 보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 (80)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차라리 빨리 가고 싶다. 얼른 끝내고 싶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축축한 밭과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들, 언덕들을 내다본다. 처음 왔을 때보다 더 푸르러진 것 같다. (81)
아이는 그 짧은 기간 동안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집에서 살면서 이전의 집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온전히 자신만을 보살펴주는 사랑을 받았다. 충분히 넘칠만큼 받았고 그만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했다. 그 성장은 나무들이 처음 왔을 때보다 더 푸르러진 것처럼 느끼는 아이의 시선으로 드러난다. 아이는 아이답게 더 푸르러졌다. 이전에는 아이 같지 못했지만 맡겨진 집에서 나무가 푸르른 것처럼 푸른 아이의 정체성을 회복한다. 그리고 아이는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깊고 따뜻하고 풍부한 감정을 읽어낸다. 슬픔의 깊이와 넓이까지 헤아린다. 그만큼 자란 것이다.
나는 손을 놓으면 물에 빠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저씨를 꼭 붙든 채 아주머니가 목구멍 속으로 흐느끼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소리를 듣는다. 꼭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때문에 우는 것 같다. (98)
작가는 구구절절 어떤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다. 한 문장으로 모든 것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하나도 버릴 것 없는 놀라운 문장들을 읽으며 전율한다.
더욱 심오한 무언가 때문에 나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꼭 그를 잡고 놓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98)
아저씨의 품에 달려가 안긴 채 다가오는 아빠를 보며 '아빠' '아빠'라고 두 번을 부르는 그 외침 속에 작가는 독자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놓으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아빠'는 누구인가. 그것은 책을 읽은 독자만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가 해석하는 아빠의 이미지에 따라 책은 다시 독자만의 이야기가 되어 다양한 변주로 새롭게 흘러갈 것이다. 이제 이 소녀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책은 그 뒷 이야기를 해주고 있지 않지만, 푸름을 잃은 원래의 집으로 돌아간 다섯 번째 아이는 다시는 자신의 집에서 경험하지 못할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 상상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그 뒷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한다.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나타나겠지만 아이는 '입을 다물고' '울음을 참으며'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리라.
아이가 성장한 만큼 독자 역시 성장한다. 모르지만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느껴진다. 나는 이미 어른이므로 아이가 느낀 그 폭풍 같은 감정만큼의 성장은 아니겠지만 나무가 조금 더 푸르러지는 것 만큼의 성장, 성숙, 감정의 깊이는 변했으리라 생각한다.
모처럼 훌륭한 소설을 만나 책을 읽고 나서도 기분이 좋다. 결코 슬프지 않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