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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나 Nov 04. 2021

번역, 두 얼굴의 수수께끼

답이 없는 고민




직역과 의역, 아주 오래전부터 열띤 논쟁 주제다. 직역은 원문에 충실하고 의역은 가독성을 중시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정의지만 무엇이 더 옳은 지는 그 누구도 따질 수 없다.


번역의 느낌은 원작의 특성을 고려해 어떤 식으로 엮어낼 것인지 역자의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 실용서나 이론서와 같이 정보 전달이 목적인 글이라면 원문의 충실성을 강조한 직역이 낫다. 하지만 문학은 다르다. 문학은 원저자의 개성과 특징이 모두 묻어 나오는 주관적 예술이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 단어를 옮기기보다는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여실히 파악해야 한다. 특유의 뉘앙스와 의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정서에 알맞게 끌어오는 의역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역자는 얼마만큼 작품에 개입할 수 있는가.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한다. 번역가 본인의 사유를 지나치게 담은 의역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비유와 생략, 그리고 간결한 문체를 중시하는 작품에서 이러한 의역은 오히려 독자의 상상력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친절이 되고 만다. 아무리 모국의 정서를 고려해 가한 첨언이라 한들, 사실은 독자의 사유에 맡겨도 그만인 부분이다. 굳이 저자의 감성을 파괴할 필요가 없다. 이는 곧 저자와 독자 모두를 무시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기에.


나 역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손바닥 소설> 中 '친정 나들이’를 번역할 때, 직역과 의역을 사이에 두고 길을 헤맸던 경험이 있다. 내 초안은 그의 함축적인 표현과 문장의 간결성을 무시한 채 ‘어떻게 하면 독자를 편하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라는 데에 집중했더랬다. 당시 나를 지도해주던 분은 내 초안을 선호하지 않았다. 원문을 쉽게 풀이하기 위해 그 속의 감정을 해쳤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금 시간을 들여 원문을 최대한 살리는 교정 작업을 해야 했다.


초안

고향 집에 온 기누코는 예전에 새언니가 친정 나들이를 갔던 날을 떠올렸다. 새언니가 태어난 산촌에서는 1월 31일 밤 남의 집 며느리가 된 딸들을 불러 팥죽에 새알심을 넣어 먹이는 풍습이 있다. 팥죽을 쑤어 나눠 먹던 옛 시절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교정 안

기누코는 자신이 고향 집에 와보니 예전에 올케언니가 친정 나들이를 가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올케언니가 태어난 산골에서는 ‘새알심 먹기’라 하여 일월의 마지막 밤이면 타지로 시집간 딸들을 불러 팥죽에 새알심을 넣어 먹이는 풍습이 있다. 그 옛날 팥죽을 쑤어 나눠 먹던 전통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일부 단락을 예시로 뽑아왔다. 같은 문장에서 탄생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수정할 부분은 존재하나 여전히 가독성은 초안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만(순전히 날 것인 내 번역이기에 애정이 있어 그런지도 모른다) 원문을 제대로 표현하고 쓰인 단어를 정확하게 나타낸 건 여지없이 교정 안이다. 물론 어떤 번역이 더 읽기 편한지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다른 판단을 내릴 것이고, 나는 양쪽의 의견을 가감 없이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충실성과 가독성을 두루 갖춘 번역이 제일 좋은 번역이라는 것을. 그러나 번역가도 사람이다. 수치로 정확히 딱딱 계산해내는 기계도 아닌데, 어떻게 한정된 시간 내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번역문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도무지 완벽한 번역문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에도 자신의 번역물의 완성도를 조금이라도 높이고자 한다면, 융통성을 한껏 발휘하여 나긋나긋 번역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직역이건 의역이건 모두 과하지 않게 말이다. 완벽한 번역은 할 수 없을지언정 적어도 완벽한 번역처럼 보이게끔 써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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