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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나 May 16. 2022

이어져 있다는 것

엄마와 딸




작년 겨울, 엄마가 설날 즈음에 함께 밀양에 가자고 말씀하셨다. 홀로 계신 외할머니를 뵙기 위해서였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2월 초, 폭풍우처럼 가혹하게 쏟아져 내린 나의 업무 스케줄 때문에 자칫 무산될 뻔했지만, 다행히 대목 나흘 전에 꿀 같은 여유가 생겼다. 우리는 갑작스레 변경된 일정에 취소된 표라도 급하게 건져내야 했다. 엄마는 차표 예매에 몹시도 능숙한 이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우리를 위해 종일 예매 사이트를 들여다보던 이모가 가까스로 표를 구해다 주셨다. 사실 처음 표를 받아보았을 때는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필이면 아주 늦은 밤 시각에 출발하는 데다가, 이동 시간도 다른 것들에 비해 긴 새마을호였기 때문이다. 기차를 타기도 전부터 눈꺼풀과 어깨 위로 무겁게 가라앉는 피곤함이 예상되었지만 애써 안 좋은 마음은 깊이 눌러 담았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오랜만에 할머니를 만난다는 기쁨에 집중해야 했다.


엄마와 나는 사흘을 할머니 댁에서 머물 셈이었다. 성향이 잘 맞지 않는 우리는 고작 그 정도의 일정에도 불구하고 아니나 다를까, 여행 일정이나 내려가는 방식에서 사소한 다툼을 반복했다. 나는 역시 엄마와는 말이 안 통한다면서 마음의 문을 힘껏 닫았다. 그래도 계속해서 화를 낼 수는 없으니 적당히 해야 할 말만 하며 꿋꿋하게 짧은 여행을 준비했다. 출발 당일, 각자 필요한 것만 간추려 싼 캐리어를 끌고 환하게 빛나는 달빛을 눈동자에 담은 채 밀양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엄마와 나는 자리가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행길에서조차 엄마와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엄마의 자리에 안내하고 내 자리를 찾아 길쭉한 통로를 돌아 나왔다. 같은 칸에 탄 사람들이 주섬주섬 자기 자리에 앉아 무표정하게 스마트폰과 이어폰을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내 좌석을 찾았고, 창가 쪽 자리에 마치 눕듯이 앉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어폰을 낀 채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긴 이동 시간을 혼자만의 즐거움으로 채워야 했다. 기차는 어두워진 밤의 고요에게 말이라도 거는 듯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밀양은 서울보다 훨씬 따스했다. 거의 새벽 1시에나 도착했는데, 붉은 가로등만 드문드문 켜진 어두컴컴한 거리에 엄마와 나 말고는 그 누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보다 훨씬 많이 밀양에 와봤던 엄마는 익숙한 듯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어색하게 그 뒤를 따랐다. 드넓은 대로변이 생경했다. 서울은 어딜 가나 길이 좁고 답답했는데. 그렇게 멍하니 걷고 있다가, 별것도 아닌 일로 엄마에게 짜증을 부렸던 내가 후회스러워서 엄마 옆으로 다가가 살짝 팔짱을 껴보았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받아들였다.


늦은 시간에 도착할 예정이니 먼저 주무시라고 말씀드렸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곱게 화장을 하고서 동그마니 앉아 우릴 기다리고 계셨다. 다리가 불편하여 침대에서 우리를 맞으셨으나, 나를 보시자마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반갑게 휘는 것이 보였다. “아이고, 우리 다애-나의 옛 이름이다- 드디어 보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할머니는 참, 작년에도 봐놓고, 그리고 죽는단 말씀 좀 하지 마세요.” 아흔한 살의 내 할머니는 여전히 소녀처럼 말갛게 웃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오기는커녕 전화도 잘하지 않는 내게 애써 서운함을 표현하지 않는 할머니, 사실은 그동안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솔직히 말하면 밀양에 가자는 엄마의 말에 나는 살짝 게으름을 피웠더랬다. 이런 약간의 불효심은 나를 가끔 우울하게도 만들고 죄책감에 시달리게도 했다. 


할머니와 엄마와 나는 짧지만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회도 잔뜩 먹었고, 그동안 쌓인 얘기도 전부 들어드렸다. 엄마와 할머니는 가끔 싸우는 듯하다가도 갑자기 까르르 웃곤 했는데, 그 모습이 참 생생하게 마음속에 담겼다. 할머니를 향한 엄마의 애정 어린 짜증은 평소에 엄마를 대할 때 나타나는 내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게 참 신기했고,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나는 아직 엄마가 할머니를 만나고 온 후 울었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여름이었으며 햇볕이 따가웠고 할머니는 집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 허름한 곳에서 살고 계셨다. 지금이야 상황이 잘 풀려서 좋은 곳에서 살게 되셨지만, 당시 너무나도 서러웠을 엄마의 마음은 아직도 내 작고 좁은 마음으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평생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느끼게 되었다. 엄마도 누군가의 딸이고, 마치 나처럼 종종 당신의 ‘엄마를 대하는 태도’에 후회한다는 사실을. 


엄마와 딸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마치 숙명처럼 풀기 힘든 앙금이 있는 사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복잡하게 꼬인 그 실타래를 속 시원히 풀어내고 싶기도 했으나,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엄마와 딸이란 게 그냥 그런 거다. 엄마와 딸은 가족이라는 의미를 한 단계 더 뛰어넘은 특별한 사이라서, 한 세월 걸쳐 묵어버린 감정으로 얽히고설켜 묵직한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그래, 우리 이제 이별하자, 하고 흔쾌히 떨어지래야 떨어질 수 없는, 어떻게든 서로를 떠나갈 수 없는, 그런 애착 어린 존재인 거다.


내가 세세히 알지 못하는 할머니와 엄마의 역사처럼, 엄마와 나의 역사에도 사랑과 미움은 언제나 함께였다. 미움이 거대한 풍선처럼 미친 듯이 부풀어 오를 때도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사랑이 너무도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움이 아주 약간만 커져도 더 콕콕 가슴을 찌르는 듯 느껴져 마치 내가 엄마를 싫어한다고 착각한 것이다. 어린 마음에 그렇게도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더는 엄마랑은 같이 살기 싫다고 나 스스로 집을 뛰쳐나온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를 아주 약간 포기했다. 연락을 주고받는 빈도는 현저히 줄었고, 서로를 향해 찾아오고 찾아가는 일도 몹시 드물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엄마는 나를, 나는 엄마를 품고 있음을 안다.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처럼 나도 엄마와 같은 애정의 수순을 밟고 비슷한 감정을 느껴가며, 그렇게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워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먼 훗날 함께 웃고 싶다. 나이 든 엄마와 마주 앉아, 까르르, 까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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