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살을 에듯 추운 계절에 따뜻한 책 한 권을 만났다. 낯선 초록빛 표지와 제목에 이끌렸다. 산문집이라고는 하나 시도 섞여 있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자니, 아, 이건 우리의 이야기다.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해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로 사랑받고 있는 시인 박준의 첫 산문집. 특유의 묵묵하지만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소중한 흐름과 함께 따스한 커피와도 같은 여운을 잔잔하게 안겨 준다.
꼭 나처럼 습관적으로 타인의 말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p.19
어떤 장을 펼쳐보든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우릴 반긴다. 박준의 글에는 외로움이 스며 있고, 그리움이 담겨 있으며, 슬픔과 애정이 존재한다. 흰 종이 위 검은 글자들이 하나하나 의미를 품고서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다. 사람과 자신에 지쳐 때로는 고독하고 때로는 외로운, 그 틈새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담담히 위로하면서. 그저 말없이 어깨를 내어주는 다정한 사람처럼.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다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p.51
박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형태를 한 사랑의 모습에 대해서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마음에 콕콕 박히는 문장들 투성이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제일 기억에 남았던 시는 아래의 '해남에서 온 편지'이다.
배추는 먼저 올려보냈어.
겨울 지나면 너 한번 내려와라.
내가 줄 것은 없고
만나면 한번 안아줄게.
p.69
할머니일까, 할아버지일까. 엄마인지 아빠인지, 아니면 형제 또는 남매. 어쩌면 친구일 수도 있고 그저 알고 지내던 동네 어르신일 수도 있고.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의 사람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의미로 통한다. 사랑. 아무것도 줄 게 없어 안아 줄 수 밖에 없는 어떠한 물질적 결핍. 하지만 그 한 번의 포옹이 얼마나 깊은 애정과 눈물을 표현하는지. 어찌보면 소소하다고 할 수 있는 이 편지와도 같은 글에서 박준의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힘을 느꼈다.
아마도 의도되었을 종이 위 주어진 여백마저도 안정감 있고 평화로운 느낌이다. 이런 섬세한 구성과 레이아웃 하나하나가 책에 더 몰입하게끔 하는 요소가 되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p.157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다고 말해 놓고서, 기어이 시인은 우리에게 같이 울자고 한다. 그러면 혼자 우는 것보다 덜 부끄럽다면서 말이다. 울지 않고 그저 참고 인내하기만을 권하는 시대에 햇살처럼 포근한 위로의 말이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된다. 어른도 울 수 있다. 물론 그 무엇도 달라지지 않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렇게 사소한 일상의 순간들도 세심하게 포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안겨줄 수 있는지 참 놀랍고 고마웠던 책이다. 그저 물 흐르듯 박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보이고 그가 보이고 다른 사람이 보였다. 무척이나 사람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그런 사람에 의해 쓰여진 글이기에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마치 이 계절과도 아주 잘 어울리는, 그래서 꼭 옆에 끼고 다니고 싶은 박준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