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기록 016

260103 새해에 쓰는 나의 생존구조 변화

by 요나윤

나에게 맞는 운동과 식습관은 복리 같다.


그게 비단 운동과 식습관에만 해당하진 않겠지만, 운동과 식습관은 물질이 비물질적 상호작용으로 보여주는 결과가 육안으로 보이는 게 확실히 큰 것 같기 때문이다. 몸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버틸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고 신체의 건강한 배설작용이 될 수도 있고… 추가하나 더 해야겠다. 나한테 맞는 운동과 식습관과 ‘휴식‘.


지난 이삼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일주일에 두세 번 운동을 하는데, 하나는 필라테스이고 다른 하나는 복싱이다. 필라테스는 두 해를 좀 넘긴 것 같고 복싱은 한해를 좀 넘겼는데 (경제력이 허락되는 한은) 이 두 개를 같이 갖고 가는 게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필라테스는 내 몸의 전체 구조를 잡아주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근육의 회복을 도와준다. 그렇잖아도 과거에 경추디스크가 의심됐던 걸 필라테스를 하면서 많이 회복하기도 했고. 복싱은 침잠하기 쉽거나 화를 제대로 풀 수 없는 상황에 신체적 발산이 어려운 내 상태를 일주일에 두 번이라도 정화해 준다. 일을 하고 있지 않으니 그렇게 운동해 온 결과를 요즘은 어디서 느끼냐면 다시 운동할 때 느낀다. 어, 나 지금 이 동작을 이만큼은 해낼 수 있네. 이 자세 좋아졌네 하는 식으로.


저것이야말로 운동과 식습관의 복리가 아닐까. 거울이나 체중계로도 증명할 수 있겠지만 ‘다음 세션에서의 나’가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것. 자세가 버티고, 호흡을 유지할 수 있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그 감각들.


게다가 원하는 만큼의 휴식에도 덧붙이고 싶은 말이 많다. 아무것도 안 하는 행위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회복이라는 물질 생산 공정이 돌아가고 있다. 근육과 신경, 호르몬, 면역체계, 배설 리듬까지 모두.


결국 운동은 투자이고 식습관은 원금관리, 휴식은 이자 재투자 여부로 비유한다면 꽤 재밌는 구조일지도 모르겠다.
덧붙여서 이 구조가 무섭기도 한 이유는 다른 영역도 결국 이 구조를 바탕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고력, 감정조절, 집중력, 판단력. 몸이 감당할 수 없으면 아무리 정신력으로 버틴다고 해도 결국은 같이 무너진다. 하지만 불행히도 휴식을 무슨 탈부착 옵션처럼 다루는 시선이 아직 존재한다는 게 문제이겠지만. 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여하튼 심하면 급한불이라도 끄러 일주일에 한 번씩 가던 한의원 횟수도 많이 줄었다. 치료에 의존하던 몸에서 스스로 회복이 가능한 몸이 된 것 같다. (체념 해서 일복이 많다고 표현하는 거지) 지난 삼 년간 혹사하길 멈추고 퇴사한 이유도 크겠지만. 더 디테일하게 보자면 나한테 맞는 운동선생님들을 만난 거나 장소를 찾은 것도 큰 행운이고. 요가며 검도며 그… 뭐더라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 안 나는데 크로스핏 같은 것도 했었고… 요가도 한 이삼 년 했지만 당분간은 내 신체 유지를 위한 움직임은 저 두 종목이 가장 조화로운 것 같다. 살아남는 새로운 기술을 터득한 것 같달까.



몸은 정직하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아프게 되면 아프게 되는대로 이유가 있고 나아지면 나아지는 대로 이유가 있고… 게다가 수면이야말로 휴식의 정수라고 생각하는 터라, 언젠가 숏슬리퍼, 롱슬리퍼라는 표현에서 발견한 나는 롱슬리퍼 쪽인데 숏슬리퍼로 살아야 하는 삶에 노출되니 몸이 망가질 수밖에. 내가 하고 싶은 거나 해야 하는 걸 위해서 잠을 좀 줄이는 것조차 몸은 누적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자연스러움을 거스르고 살면서 그걸 의지부족이나 멘털문제로 착각한다.


몸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그냥 누적하고, 계산하고, 나중에 병원 등을 통해 신체 수리비 청구서를 내민다. 수면은 휴식의 옵션이 아니라 시스템 업데이트 같은 거다.


자연스럽게 사는 게 제일 어려운 것 같다. 반드시 도심을 떠나서 자연물이 울창한 곳에 가야 꺼낼 수 있는 표현이 아니라. 자연스럽다는 건 결국 자기 구조에 맞는 걸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내 구조에 맞으면 편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덧붙이자면 내 발산의 방식은 외부자극에서 오는 스트레스들을 글을 써서 풀어내거나 하는 방식이었다. 감정 배출 같은 것이랄까. 그런데 그 발산방식은 내 신체적 회복이나 단련을 물리적으로 돕진 못한다. 다스리는 방식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십 년 전의 나는 가라앉히는 방향으로만 살펴본 것 같다. 2018년쯤이었나 이후 두 해 정도 요가를 했던 이유도 그런 것이었고. 그때의 나에게는 그 방식이 내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숨고르고, 내려놓고, 버티는 쪽.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생존구조는 또 바뀐 것 같다. 몸이 조금 나아졌고, 내 상태를 관찰할 수 있는 약간의 여유도 생겼다. 요가를 통해서 호흡과 내부관찰을 배우고, (약간의 재능은 타고난) 꾸준한 글쓰기로 감정배출과 의미화, 정신 정리는 조금 더 나아진 것 같다. 그리고 이후로 필라테스로 나를 재정렬하고 회복을 보조하며 동시에 복싱으로 공격성을 안전하게 배출하는 신체발산을 하고 있는 식으로. 단계적으로 이어진 내 생존구조 발전에 잠깐 박수 한번치고 가야겠다.


게다가 남들의 삶의 양태에 크게 눈치 보며 사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에도 의미를 두고 싶다. 갑자기 닥치는 사고나 나이에서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신체기능의 저하는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지만 적어도 살면서 내 주변의 양태에 다들 이때쯤 되면 이러니까 나도…라는 잣대에 휘둘리지 않은 성격도 한몫한 것 같다. 이런 성격의 태도가 아프면 이유를 돌아보고, 나아지면 경로를 기억하고, 조정해 보려는 것으로 이어진 게 다행이랄까. 그저 고집이 아니라 내 몸과 삶에 대한 책임을 시대의 평균에 외주로 주지 않았다는 거.


그 끝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계속 내 순리대로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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