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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용백 the 돼지국밥 Sep 01. 2020

쫄따구의 향연

회사, 부족 국가의 흔적

  현대 사회는 아직도 부족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단 무리를 지칭하는 부족이라는 단어가 회사, 사업, 등등의 여러 단어로 바뀌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이다.


  내가 속해 있는 부족의 배치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굉장히 권력 중심적이고 폭력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우선 연구실에는 문이 네 개가 있다. 팀장님들은 각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안쪽에 자리해 문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데, 그 앞으로 직급 이 높은 순에서 낮은 순으로 약 6m 가량의 긴 사무 책상 여러 개가 세로로 줄을 지어 서 있다. 팀장은 적으면 한 줄에서 많으면 다섯 줄의 책상에 일렬로 앉아 있는 쫄따구들의 옆 모습을 한눈에 내려 볼 수 있으며, 그들의 쫄따구들은 언제나 자신의 모니터가 보여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쫄따구들은 나름의 짱구를 굴려 그나마 숨을 쉴 수 있는 작은 방안을 고안해냈다. PC 카톡 창의 배경을 캡처한 사내 메신저 배경으로 바꾸어 사담을 하고 있음에도 공담을 하는 것처럼 위장했고, 그마저도 듀얼 모니터의 화면이 살짝 겹치게 두어, 겹치는 곳 사이의 화면에 카톡 창을 짱박아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막내인 나는 팀장들의 거듭된 회의의 결과로 두 번째 문 바로 앞자리에 배정을 받게 되었다. 이 문은 상무와 상무의 쫄따구인 부문장이 지나다니고, 그들의 쫄따구인 팀장이 지나다니고, 또 그 쫄따구의 쫄따구의 쫄따구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이다. 상무도 사실은 어느 누구의 쫄따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아침도 여느 날과 같이 쫄따구들의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팀장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옷걸이에 겉옷을 벗어 걸어두었지만 패딩이 너무 크고 길어서 옷걸이에 잘 걸리지 않고 미끄러졌다. 어쩔 수 없이 패딩을 개 빈자리의 의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런 다음 탕비실에 가 간식 두 어 봉지를 주머니에 꿍치고, 담터에서 나온 호두 아몬드 율무차도 두 봉지를 찢어 종이컵에 탈탈 털어 넣었다. 뜨거운 물을 붓고 커피 막대로 휘휘 저었다. 호두와 아몬드는 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물은 어느덧 율무차가 되어 아름다운 아이보리 빛을 발했다. 하지만 막대질을 멈추면 안 된다. 여기서 멈추었다가는 율무차를 모두 마셨을 때 종이컵 바닥에 율무 덩어리가 뭉쳐 커다란 협곡을 이루는 자연의 신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얇아 이리저리 잘 휘는 싸구려 커피 막대였지만, 종이컵 구석구석과 바닥 모든 곳에 닿을 수 있게 온 힘과 열의를 다해 율무 가루를 섞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원고 파일을 열었다. 원래 수요일에 들어왔어야 할 원고가 금요일 새벽 네 시에 들어와 있었다. 작가님이 밤을 새워서 작업을 하셨는지, 급하게 써 내려간 티가 역력히 났다. 원고의 질은 그리 좋지 않았고 내가 다 수정할 요량으로 글을 모두 지웠다. 이제 이 파일에는 우리가 제공한 원고 폼만 남아 있었다. 이럴 거면 원고료는 나한테 줘야 한다고 옆자리 쫄따구와 같이 투덜댔다. 옆 쫄따구의 사정도 그리 좋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원고 대신 지금 당신들이 보고 있는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새벽 네 시에 잠시 눈을 떴는데  왜 글을 쓰지 않았냐고 묻는 카톡을 읽었다. 원고는 언제 보내 주실 수 있냐고 묻는 나를 보며 작가님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셨을지 살짝 헤아려 볼 수 있었다. 갑자기 부담감이 훅 몰려왔다. 이번엔 꼭 글을 써야겠다 싶어서 ‘글을 쓰고 인쇄까지 해서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안 쓰면 오만 원을 내겠다.’고 호언장담도 했다. 50000원, 숫자로 표현하면 붙여 쓰지만 한글로 표현하면 띄어 쓰는 오만 원은 아주 큰돈이다. 5일 치 점심값이기도 하고 하루치 술값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돈을 그냥 생으로 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층에서 가장 많은 쫄따구를 거느린 상무가 내 자리를 지나 문밖으로 나갔다. 나는 지금 일을 하고 있지 않지만 당당하다. 상무는 내가 원고를 수정하고 있는 줄 알 테니.


  편집자는 언제나 맞춤법, 띄어쓰기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분들이 써 오신 글을 읽으면서도 저는 가끔가끔 교정을 볼 때가 있었답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 이 글에도 혹시 잘못된 맞춤법이 있을까 싶어 맞춤법 검사기에 이 글을 한 번 돌려 보았다. 저도 사람인지라, 띄어쓰기 틀린 곳이 몇몇 있었어요. 안심하세요. 맞춤법 검사기는 ‘쫄따구’라는 단어를 졸개라는 단어로 순화해 주었는데 영화 <고교얄개>가 생각났다. 졸개와 얄개. 모두 나와 잘 어울리는 단어 같았다. 무튼 맞춤법 검사기가 아무리 쫄따구를 졸개로 순화한다고 해도 나는 고칠 생각이 없다. 이 글의 포인트가 바로 쫄따구가 주는 특유의 어감이 좋기 때문이다.


  잠시 포스트모더니즘을 떠올렸다. 이렇게 중심이 없고 이야기가 없는 글을 컨셉으로 아주 길게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겨우 쫄따구, 율무차를 논하는 내 글에 무슨 포스트모더니즘 하고 풋 웃어 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쓰면 오늘 하루 만의 이야기로 장편 소설 한 개는 거뜬히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토지까지는 무리가 있지만 안나 카레니나 정도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문예지에 한번 투고를 해볼까? 아마 그들도 풋 하고 웃은 다음 이 글을 쓰레기통에나 던져 버리겠지. 뭐든 상관없다. 이렇게 글 쓰는 게 재밌다는 것을 알았으니, 브런치나 블로그를 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꽤 썼으니, 일을 하러 가야겠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너무 많지만 그 말을 모두 썼다가는 오늘 하루가 망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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